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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훈민정음의 새로운 해석] 훈민정음 창제의 진실

훈민정음 제자해 서문을 직역과 의역을 가미하여 풀이하면,

 

' 나라 사람들의 말소리(國之於音)가 중국과 달라서(異乎中國) 문자와 더불어 서로 말하면 뜻이 통하지 않았다(與文字不相流通) (이리되자) 이런 현상을 걱정하는 백성이 있었고(故愚民), 뜻을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에) 말을 했으나 끝내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전달할 수)가 없었으며, 그러한 경우와 백성들이 많았다(有所欲言 而終不得 伸其情者 多矣), 나는 이러한 현상을 우려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새로 28자를 만들었으니 (予當此憫然 新制二十八字) 백성(사용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히게 하고 (문자와 더불어) 늘 사용함에 있어서도 뜻이 통하도록 편리하게 할지어다.(欲使人 人易習 便於日用矣)' 로 풀이되는 서문이 있다.

 

 

세종(世宗 1418 - 1450) 실록에 보면 한글(언문:諺文)은 세종 이전에도 이었고 세종 시대에 와서 없던 것을 창제(創製) 한 것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세종실록 세종 26년 2월 기록 : 諺文皆 本古字 非新字也) 역사적으로 한글은 근세조선 세종(世宗)때에 와서 새로 만들어진 창제(創製)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 있었던 많은 표음(表音)부호를 28자로 축약 정리했다는 뜻을 세종실록은 분명히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없었던 것을 세종시대에 이르러 세종이 새로 직접 만들어 편리하게 쓰도록 했다는 것은 곧 거짓말이란 뜻이다.

 

 

조선역사의 감추어진 진실은 역사서의 기록, 가까운 곳에 있고 현재와 같은 한글이 만들어지게 된 이유와 목적도 훈민정음(訓民正音) 제자해 서문(序文) 짧은 문장 속에 넉넉하게 있다.

이 서문(序文)을 사실대로 쉽게 다시 풀어쓰면,

 

 

"나라 안에서 백성들이 발음하는 말소리가 지방(地方) 마다 사투리가 심하고 달라서 서울(中國: 권력 중심이 있는 국도)과 말이 통하지 않았다. 문자(文字:한자)는 같은 것을 쓰면서도 글자(漢子)를 발음하는 형태가 경향(京鄕) 각지, 지방마다 달라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뜻이 말로써는 불가능해지자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있던 조정에서는 경향(京鄕:서울과 지방)의 한자발음 방언을 발음부호28개로 조정했다. 앞으로 말을 하여 뜻을 전달하는데 누구든 공통적으로 28자를 사용하여 문자(文字)와 더불어 표준 발음을 하여 뜻이 통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여라,"로 싱그럽고 명쾌하게 새 번역, 해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기득권 학자들의 기존해설처럼 훈민정음을 풀이하면 아무런 의미를 줄 수 없고 이해하기 곤란한 서문(序文) 해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훈민정음 제자해 서문을 더 쉽게 요약하면,

 

① 한글은 당시 통용되던 문자(文字: 漢字 <韓字>)의 발음부호이 정리하였으며,

② 세종의 28자() 발음부호(한글)제정은 요즈음으로 말하면 표준말 구성의 기초적인 자음, 모음의 기준을 새로 정한 것이며,

③ 여기서 말하는 중국(中國)이란 뜻도  국도(國都: 서울)의 뜻이며, 조선이란 나라의 한가운데에 해당하는 권력의 핵심부이자, 조정(朝庭)이 있는 곳을 말하는 것이다. 현 대륙 중국을 말하는 것은 될 수가 없다.

 

 

 반도사람들이 한자를 발음하는 것이 현재의 대륙을 지칭하는 중국(中國)과 서로달라 의견을 서로 교환할 수 없었던 이유에서 중국인과 통하게 하기 위해기초적인 새 부호28자를 만들어냈을 경우라면 세종은 그 당시 중국의 한자 발음체계를 도입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기 위해 집현전 학자들로 하여금 수십 차례 연경(燕京)의 음운(音韻) 학자들을 만나게 하여 28라는 발음 부호를 완성한 것이 된다. 또한 지리적으로 중국(中國)과 떨어져있고 반도라는 영역 내에서도 사투리와 방언은 수없이 많은데 중국 백성과 조선백성이 서로가 전하고자 하는 뜻을 쉽게 전달하지 못해 개선책으로 발음부호(한글) 28자를 제정했다는 불필요한 해설이 된다는 것이다.

 반도에서 대대로 살았을 반도 백성들이 대륙의 중국(中國) 사람들과 함께 문자와 더불어 말을 했으나 뜻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편하고 걱정까지 해야할 필요는 과연 있을 것인가! 그럴 이유는 없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조선이 같이 한자라는 문자를 공용 문자로 쓰고 있었다 하더라도 조선인은 조선인들끼리 발음하는 체계로 하면 서로 뜻이 통할 것이다. 그런데 마치 조선 백성들이 중국인과 소통할 수 없는 발음을 하여 의견교환을 하지 못하여 불편하게 생각하고 걱정까지 할 상황 이였다면 세종시대에는 중국인과 조선인은 구분이 없었다는 말과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15C 이 당시에는 명()나라는 있었어도 국도를 가지고 있으면서 정부조직을 가지고 이었던 중국(中國)이란 나라는 대륙과 동아시아 전체 어느 곳에도 없었다. 있었다면 그것은 조성의 왕국이자 한국이 있었다. 때문에 훈민정음 제자해 서문 중 중국(中國)이라고 쓰여진 본래의 중국 의미는 나라 가운데(국도)라는 의미로 해석이 되어야 전체문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반도백성들이 중국인과 문자를 두고 발음하는 체계가 달라 의사소통을 못하여 불편함을 느끼고 걱정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정부에 통역관을  두는 부서가 있었고 사신 및 사절단이 오고 갈 때는 대동하여 의사소통을 해야할 책임은 조정에 있는 것이지 조선백성 중 일반 백성들이 의사소통을 못하여 28자를 만들어 사용하면 중국인과 의사소통이 된다는 것은 출처와 근거를 찾을 수 없는 해설이 될 뿐인 것이다.

 15C 중반 조선국왕인 세종(世宗)은 어차피 다를 수밖에 없는 조선국인과 명()나라 사람들과 한자(漢字) 발음체계를 일률적으로 교정하기 위해 28자의 발음부호를 만든 것이 아니라 조선국내의 서울(:국도) 지역 및 지방 사람들과의 원할한 의사소통을 위하여 국내용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렇다고 15C 세종시대의 조선이 반도로 한정됨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한자를 발음하는 발음부호인 기초글자 28자의 제정은 세종(世宗)과 당시의 집권세력은 조선국내의 언로(言路) 통일을 위한 언어통일 정책의 일환으로 중구난방인 발음 체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목적이었다.

 14C 말에 새로 탄생한다는 조선국을 조선왕조실록과 명사(明史)를 통해서 보면 세종(世宗)이 집권하고 있을 때까지도 나라 규모로서의 체계가 잡혀있지 않았다. 지금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도입한 지 50년이 넘었는데도 이 땅에 민주주의 제도가 정착하지 못하고 허공을 맴도는 것처럼 이성계(李成桂)가 정권을 찬탈한 뒤 50년이 지났던 세종집권 후기에도 조선은 중앙정부를 비롯한 지방정부가 어울러지는 조정도 없었고 체계를 갖춘 나라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종(世宗)이 집권해서도 왜()의 침략으로 남방(南方)이 어수선하여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여야 했고 서북방(西北方)의 올량합(兀良哈)의 세력과 북방, 동북방의 출신이 분명치 않은 야인(野人) 세력들과 국경을 정하지 못한채 토벌과 정벌(征伐) 등의 용어를 사용하여 전쟁을 치러야 하는 불안정한 시대의 나라가 조선국의 세종시대였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쓰고 있다.

 왜인(倭人)에게는 삼포(三浦)를 개항 해주어 남방을 조용하게 한 다음 다시 북방(北方)에는 장성(長城)을 수축하고 경원(慶源), 경흥(慶興)등지에 성()을 쌓는 등 소위 6진(六鎭)을 완축(完築) 했다는 시점을 맞이하면서 어느 정도 변방 문제가 진정국면으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이런 후 세종과 집권 세력들은 국내(國內) 문제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다.

 옛날 진() 나라의 재상 이사(李斯)가 혼용되어 국내에 질서 없이 쓰여졌던 글자를 취합하여 소전(小篆)이란 글자를 만들어 언로(言路)와 국론(國論)을 통일하면서 진() 나라가 통일위업 달성했고, 체제 구축을 공고히 했다는 것을 착안하여 발음부호 28자를 제정하게 이른다.

 갑자기 새로운 문자(文字)를 만들 수도 없고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안 세종과 집권세력들은 지금까지 쓰던 문자(文字:漢字)는 그대로 두고 한자를 발음하는 체계를 정비하여 서울(中國)과 지방, 지방과 서울간의 한자 발음체계의 통일화를 꾀한다. 이때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이 한자를 발음하는 부호인 한글 기초표기 28자의 탄생인 것이다.

 

 문자와 동시에 언어를 통일한다는 것은 전통왕조 시대에 있어서는 왕가(王家)로 보나 당시의 집권세력의 위치에서 볼 때는 권력유지에 있어서는 중요한 사안에 해당된다.

 왕조중앙집권체제 중심이자 일가(一家)의 왕조시대에 있어서의 권력 재창출과 유지에 있어서는 강역내의 각 곳으로 왕과 집권세력의 의지가 전달되어야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서울과 지방교류에 있어서 언어(言語)의 획일화(통일) 정책은 정권유지 차원에서도 서둘러 했어야 하는 업무중의 하나였다.

 한정된 강역에서 이 고을과 저 고을의 말이 다르고 서울과 지방의 말이 다르고 지방과 지방이 사투리(방언)가 심하여 서로간 의견 교환이 불가능한 상태의 나라가 조선이었다면 그 조선의 군주와 집권세력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경우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강력한 정치권력이 중앙에 있으면서 지방정부를 통치하려면 우선적으로 말과 함께 뜻이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다. 왕이나 권력층의 의사가 영역내의 지방 정부와 관할지역 백성들에게 말하고 이해하는 것이 서로 달라 왕의 교지(敎旨)나 유시(諭示)가 전달되지 못하고 중앙정부의 지시가 방방곡곡에 퍼지지 못하면 백성들로부터 추앙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중앙조정이 있다는 것 조차도 몰랐을 경우라면 그러한 중앙정부는 왕권(王權)도 정권(政權)도 조정(朝廷)도 아니었거나 없었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15C중반에 세종(世宗)과 조선국의 집권 세력들이 한글이라는 한자 발음체계를 정리한 28자를 만들어 공포했다는 것은 집권 세력들의 권력강화와 중앙집권체제 구축에 있는 것이지 조선국 백성들이 중국인들과 의견을 교환할 수 없는 것을 불쌍히 생각하여 만들어주었던 것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세종실록에 쓰여져 있는바와 한글이란, 즉 한자 발음체계의 부호는 세종 이전에도 있었으며 세종 시대에는 그것을 28자로 일목 요연하게 정리했을 뿐이란 사실이다. 세종의 아버지(태종), 큰아버지(정종), 할아버지(태조)란 인물들 및 구테타에 성공한 후 훈구 세력으로 등장한 조정의 개국공신들 모두는 고려(高麗) 조정의 신하들 이였고 특히 태조, 정종, 태종은 고려시대 말기에는 고려 조정을 좌지우지하면서 고위직에 있었던 인물들이었다.

 고려를 물려받은 정부가 조선(朝鮮)이다. 그렇다면 고려국 내에서는 한글과 유사한 발음체계가 없었느냐 하는 것이다. 틀림없이 있었고 세종이 정리했다는 28자의 규모처럼 단순 정리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말의 체계가 있음으로 해서 중앙(中央)의 대신들의 각도(各道)의 병마사(兵馬使), 안무사(按撫使)로 임명되어 무사히 업무를 집행하고 중앙정부로 복귀하곤 했던 것이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여진(女眞), 거란(거), 왜(), 몽고(夢古), 북송(北宋), 남송(南宋), 동진(東眞), 합단(哈丹), 오(), 오월(吳越), 명(), 유구국(琉球國), 대식국(大食國) 등과 광역적인 교류를 하면서도 고려백성들의 중국에 있었다는 나라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도 불편하게 생각지 않았고 사신 및 상인(商人), 학자, 문인들의 왕래가 자주 있었으며 귀화, 투항인도 많았었다는 고려사기록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와 태조, 정종, 태종시대 까지도 중국 사람들과 조선 사람들이 쓰는 말은 분명히 달랐다고 세종은 훈민정음 제사해 서문(序文)에 분명히 쓰고 있고 자신이 왕위에 있을 때도 그랬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조선백성이 중국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그 점을 불쌍히 생각하여 중국인들과 의견 소통이 되도록 하기 위해 새로 28자를 만들어주었다고 하는 뜻의 해설은 과연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까? 당시에 지금의 대륙에 중국이라는 정치권력이 있었고, 그들 백성들을 칭하는 중국인(中國人)이 있었을 경우라면 당연히 반도의 조선 백성들과 말하는 것이 지금처럼 달랐다는 것은 오히려 상식이 아닌가.

 세종과 당시의 집권 세력들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오랜 세월동안 다른 발음체계를 가지고 중국과 조선은 별도의 강역에서 살았으면, 백성들끼리는 교류 또한 원활하지 않을 때다. 중국인과 조선인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뜻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28자를 만들어 교육시키면 곧 반도조선인과 중국인이 의견 교환을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중국과 조선의 발음체계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난 후 세종이 만든 한자의 발음체계 부호 28자를 익힌 후대 사람들 중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한자를 놓고서 또는 더불어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는 것과 같다. 뿐만 아니라 중국 사람들도 세종이 만들었다는 28자와 똑같은 한자 발음체계가 있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15C 세종(世宗)의 훈민정음 제자해의 현재해석이다.

 한나라의 왕이 허튼 소리를 할 리는 없는 것이고 문서(文書)와 왕조실록에까지 제정한 이유와 근거를 설명해 놓았다면 이것은 그냥 해보고 버려져야 할 사안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된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세종을 비롯한 당시의 집권 세력들은 중앙집권 체제 강화와 국론(國論) 통일의 시급함을 이유로 훈민정음을 만들었던 것이다.

만들었던 장소 역시 반도가 아닌 대륙의 한국에서였다.  중앙조정에서 반포한 율령이나 임금이 내린 유시를 이 지방 출신 관료와 저지방 출신 관료가 읽어내려 갈 때 사투리(방언)로 인해 서로 알아들을 수 없을 때의 난감한 표정이란 보지 않았어도 뻔한 것이다. 또한 훈민정음(訓民正音)이란 글자가 말해주는 것처럼 백성들에게 바르게 발음하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고, 바르게 발음해야 할 모체(母體)는 다름아닌 한자(漢字)라는 뜻글자인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권력을 향해 집착이 강한 사람이나 집단은 그들이 정한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의 조직폭력배의 보스와 추종 무리들과 같은 것으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들은 야욕을 채우기 위해 죽음을 결행한 모험을 감행하여 성공하면 영화와 풍요, 실패하면 죽음과 나라밖으로 추방을 감수해야할 양자택일의 경우에 놓인다.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한 강한 무리들은 민초(백성)들을 가능하면 짓누르고, 속이고, 감추는데 있어 담보물 정도로 생각하는 인정사정 없는 무자비한 속성을 가진 부류들이다.

 세종도 국론의 재통일과 중앙집권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문화(文化)정책 일환으로 훈민정음을 반포했다. 진의(眞意)는 나라 사람들이 공용(公用)하여 서울과 지방의 언어통일 정책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만들어 공포했다고 하지만, 이럴 때 훈민정음의 발음체계 기준 설정과 확립은 왕을 비롯한 당시 집권 세력들인 실세들이 쓰는 발음체계로 만들어 반포했던 것이다. 즉 중국(中國:서울, 국도) 중심의 발음을 정리하여 조선국 전체에 왕명으로 반포했던 것이다.(지금의 북경관어와 같다) 이러한 문화정책은 다른 정치 세력들을 제거하거나 무력화시키는데 장기적으로 효과가 있는 정책이다. 이러한 맥락은 20C초에 일본이 조선에서 행한 문화정책과 같은 맥락이다.

 전통왕조 시대에 강력한 군주(君主)이자 왕의 명을 거역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특히 경향(京鄕)의 관리들이 왕명을 따르지 않고서 기존질서를 고수하면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관직에서 척출 되며 귀양감은 당연한 귀결이다. 사용거부는 곧 왕명을 거역하는 것이 되고 집권실세에게 저항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때로는 혹형을 감수해야 한다. 또한 무력으로 진압된다. 어떻게 얻어진 벼슬인데 거역하고 저항하겠는가, 특히 국운(國運)과도 관련이 없고 자신과 선조들이 어떻게 지켜온 가문(家門)과 혈통(血統)인데 이러한 국가의 문화정책 하나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겠는가. 또한 이러한 사안에까지 반대를 하고 저항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면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라는 체념 상태에서 복지부동하여 새로 만들어진 발음체계를 익히게 되는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권력집단이 그러하듯이 관료집단 또한 크게 달라질 것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최소한 나라안의 대소신료 및 지방관리들에 이르기까지는 원활한 의견 소통이 이루어져 국정 수행에 많은 장애물이 제거되는 이로움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중대한 사건이 있었는데도 중앙과 지방에서 아무런 저항이 없으면 이상하다고 생각한 실록 편찬자들은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새 훈민정음 반포에 대한 유일한 반대자를 세종실록 22년(1444) 2월 20일조에 등장시키니 이 사람이 곧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里)란 불세출의 인물이다.

 최만리(崔萬里)가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반포될 때는 가만히 있다가 2개월후에 반대한 이유는 세종22년 2월의 기록(세종실록)에 자세히 나와있다. 성리학자(특히 주자학 분야에 정통)였던 최만리가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한 이유 중 가장 우선하는 것은 알려진 것처럼 한자(漢字) 사용을 고집해서 반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의식 있는 학자였다. 고려왕조가 조선왕조로 이어져 세종이 한자를 읽어 뜻을 전달하는 발음체계(音韻)를 새로 정리하기 전까지 사용했던 기존의 음운체계가 엄연히 있었는데 공론(公論)화 없이 갑자기 바꾼 것에 대한 견해이자 반대 성향의 상소를 했던 것이다. 즉 한자(漢字) 제일주의자 이거나 없었던 대륙전체의 중국(中國)이란 국가 때문에 반대했던 것이 아닌, 기존의 음운체계를 갑자기 바꾸면 혼란이 예상된다는 이유와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서서히 실행에 옮겨야할 것이란 이유로 반대성향의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최만리를 비롯한 수많은 성리학자들이 유학경전 원전(原典)들을 읽으면서 지금까지는 그들 나름대로 지나온 시대에 정해놓은 음운 체계가 있었는데 새로운 음운체계에 대한 갑작스러운 실행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따라서 최만리가 반대한 이유에서도 중국과 한자와 결부된 그 어떠한 사실도 없다. 있다면 집현전 학자들로서 세종과 함께 조정에 부상한 신진세력(성삼문, 이개등)들의 독주를 어느 정도 저지하면서 세종의 개혁적인 통치에 완급을 조절하고자 하는 의미의 반대였던 것이다.

 어떠한 역사서나 사료(史料), 문집(文集), 유학경전을 살펴보더라도 중국(中國), 중조(中朝), 중원(中原), 중주(中州)로 연결된 용어가 주는 의미가 현재의 중국전체를 상징하거나 지칭한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 훈민정음 제자해 서문의 중국(中國) 또한 광역 조선국(국가, 나라)의 가운데 또는 중심(中心) 지역이란 의미 이외는 없는 것이다.

 

 

출처:[훈민정음의 새로운 해석] 훈민정음 창제의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