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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전라도 혈통 김정일의 가계도

전라북도 김제시와 완주군 경계에 있는 산으로 모악산은 '엄뫼', 곧 '어미산'이란 우리말을 한자로 바꾼 것으로 높이 793m이다. 전주시 남서쪽 12㎞ 지점에 위치하며, 아래로 김제평야와 만경평야가 펼쳐진다. 산 정상에 어미가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형태의 바위가 있어 '모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정상에 올라서면 전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남으로는 내장산, 서쪽으로는 변산반도가 바라다 보인다.(현재 모악산최정상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최정상에는 접근불가하고 군부대 근처까지만 올라갈 수 있다)    예로부터 모악산은 논산시 두마면의 신도안(新都安), 영주시 풍기읍의 금계동(金鷄洞)과 함께 명당(名堂)이라 하여 난리를 피할 수 있는 피난처이자 각종 무속 신앙의 본거지로 널리 알려져 왔다. 모악산 기슭의 김제 금산사 부근에는 지금도 증산 사상을 신앙으로 이어오고 있는 군소 종교단체가 40여개나 남아 있다.


<기차안에서 찍은 모악산, 정상이 구름에 묻혀있다.모악산 앞족에 금산사가 자리하고 있으나 보이지 않는다.>

전주 김씨인 김일성과 김정일의 조상인 김태서 의묘가 모악산에 자리잡고 있다. 김일성의 12대조 김계상이 전주에서 함경도로 옮겨 갔고, 고조부인 김응우가 함경도에서 평안도로 이주하여 만경대에 자리잡았다. 김응우는 피지배 하층계급인 전통적인 소작농이었다. 그 증손자인 김일성이 13살때 만경대를 떠나 만주에서 본명 김성주로 활동하였다. 풍수가들은 전주 이씨의 5백년 조선은 모악산의 기운에 힘입은바 크다고 하고  전주 김씨의 김일성 김정일도 모악산 명당터에 묘를 썻기 때문에 운()이 좋아 부자간에 최고의 권력을 누린다고 한다.

김정일 가계 및 고향, 출생일

△김정일 : 고향 : 구소련 연해주 하바롭스크 주 브야츠크의 소련군 야전병원, 출생일 - 1942년 2월 16일
* 다른 이름 : 유라 (구소련에서 어린시절 불렀던 이름으로, 1960년 7월 남산고 급중학교 졸업 당시 김정일은 동무들에게 "조선식 이름이 정일이라고 결정되어 공민증이 발급됐다. 이제부터 정일이라고 불러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부인 : 김정일이 공식 결혼식을 한 부인은 김영숙이지만 별거하고 조선 예술영화 "분계선 마을"의 주인공이었던 유부녀 성혜림을 60년대 말부터 데리고 살다가 김정남을 낳았고, 혁명무용 "눈이 내린다"의 주인공 고영희와 눈이 맞아 성혜림을 모스크바로 보냈으며(2002년사망) 그후 부인 고영희는 아들 정철, 정훈과 딸 일순을 낳았지만 2004년 사망, 현재는 여비서 김옥이 정부이고 그 외에 동거를 하거나 첩으로 살고있는 여성들이 수십명있다고함.
△부친 김일성 : 고향 -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 (지금의 평양시 만경대구역 만경대 초가집), 출생일 - 1912년 4월 15일
△모친 김정숙 : 고향 - 함경북도 회령군 읍(지금의 함경북도 회령시), 출생일 - 1917년 12월 24일
△계모 김성애 (북한사람들은 잘 알지 못함. 안다면 1924년 생이란 것을 알고 있음)
△삼촌 1 김철주 (북한 사람들은 고향이 만경대라는 것과 1916년 생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음)
△삼촌 2 김영주 (북한 사람들은 김일성의 동생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음)
△친동생 김경희 (남편 장성택)
△이복동생 김경진(여), 김평일, 김영일
△할아버지(조부) 김형직(1894. 7. 10 ~ 1926. 6. 5) : 고향 -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지금의 평양시 만경대구역 만경대 초가집)
△할머니(조모) 강반석(1892. 4. 21 ~ 1932. 7. 31) : 고향 - 평안남도 대동군 (지금의 평양시 만경대구역 칠골)
△작은할아버지 김형록, 김형권(이중에서 김형권만 내세우고 있음)
△증조할아버지(증조부) 김보현 △증조할머니(증조모) 이보익 △고조할아버지(고조부) 김응우


김정일 가계의 존칭과 주요활동
△김정일 - 주체사상(김일성주의)의 이론, 방법을 전일적으로 체계화하여 온사회의 김일성주의화 선포.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장군. 백두광명성.
△김일성 : 우리인민이 수천년 력사에서 높이 모신 위대한 수령.
△김정숙 : 항일의 여장군, 백두여장군, 김일성을 모시는 자세와 입장이 투철한 공산주의 귀감.
△김철주 : 반일 공산주의 혁명투사. ? 형님인 김일성을 따라 중국인 반일부대들과의 반일연합전선형성 과정에 전사하였다고 선전
△김형직 : 반일 민족해방투사, 민족주의운동로부터 공산주의운동으로의 방향전환의 선구자. ?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국민회'를 조직 결성(1917년)하였으며 평양에서 3.1운동을 주도하였다고 선전. 김형직의 사상을 '지원(?)'사상이라고 선전.
△강반석 : 불요불굴의 공산주의 여성해방투사. 조선의 어머니. ? 독립운동단체인 '반일부녀회'를 조직결성 하였다고 선전
△김형권 : 반일 민족 공산주의 혁명투사 ? 김일성의 지도하에 항일유격대 창건의 준비단계로 '무장소조'를 이끌고 함경나도 풍산군(지금의 양강도 김형권군)에 진출하여 파발리 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악질순경 오빠시를 처단하였으며, 변절자의 밀고로 체포되여 형무소에서 사형당했다고 선전. 북한영화 '누리에 붙는 불'의 모델.
△김응우 : 만경대 주민들을 동원하여 대동강에 기여든 미제해적선 '샤만호'를 불살라 버렸다고 선전

1) 김형직 (김일성의 아버지) :
김형직(金亨稷)은 전주(全州 또는 完山) 김씨로 1894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나 평양숭실학교를 마쳤고 1917년 3월 강동군에서 항일독립운동 단체인 조선국민회를 결성했다. 조선국민회 활동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뒤 만주로 망명했다.

북한의 문헌에 의하면 비합법적 단체 조선국민회와 함께 학교계, 비석계, 향토계 등의 계를 결성하였고 중강, 무송 등지에서 광제의원, 무림의원, 순천의원 등을 설립, 의료사업과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항일운동을 하였다고 한다. 김일성의 나이 14세때 1926년 32세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다.

북한 정권 수립이후 아내인 강반석과 함께 <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로 추앙 받아 김형직사범대학, 김형직 인민병원 등이 설립되었다. 북한에서는 국가적인 위대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관련된 자료가 모두 북한 것으로 한정되어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2) 강반석 (김일성의 어머니) :

강반석(康班石)은 김형직보다 두살 위로 1892년 4월 21일 기독교 목사이며 교육자 강돈욱의 둘째 딸로 태어나 1908년 기독교계 평양숭실학교를 나온 김형직과 결혼하여 김형직 나이 18세, 강반석 나이 20세때 첫 아들인 김성주(김일성) 낳았고 그 후 둘째 아들 김철주(오래 살지 못했다), 막내 아들 김영주(북한 부주석을 역임했다) 등 삼형제를 낳았다.

1919년 남편인 김형직이 조국광복회 사건에 연루되자, 김형직을 따라 만주로 이주하여 한약상을 하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다가 1932년 7월 31일 40세로 병사(病死)했다. 김형직과 강반석 집안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집안이었다. 강반석의 집안은 김형직의 집안보다 더 독실한 기독교인들로 강반석의 부친 강돈욱은 만경대 일대에서 신임을 받던 교육자이자 장로교 교회의 장로였다.

북한에서는 '조선의 어머니'로 추앙 받아 1960년대 조선민주여성동맹의 주도로 '강반석 녀사 따라배우기 운동'을 실시했고, 그녀의 동상도 세워졌다. '강반석 혁명유자녀 학원'을 비롯하여, 학교와 탁아소 중에도 강반석의 이름이 붙은 곳이 있다.

 

3) 김일성 (1912년생~1994년 사망) :

김일성은 1912년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古平面) 남리(南里)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김성주(金成柱)이다. 아버지는 김형직(金亨稷), 어머니는 강반석(康盤石)이고, 동생으로 김철주(金哲柱)와 김영주(金英柱)가 있다. 어려서 부모를 따라 만주 지린성[吉林省] 푸쑹[撫松]으로 이사하였고, 1926년 지린 육문(毓文)중학에 입학하였으나 1929년 중퇴하였다.

그 뒤 소련에서 특무공작요원 훈련을 받고 1945년 소련군 장교가 되었다. 1945년 8·15 광복과 더불어 소련의 붉은군대를 따라 소련군 대위 신분으로 평양에 들어와 김영환(金英煥)이라는 가명으로 정치공작을 폈다. 곧 소련군 소령으로 진급하고, 그해 10월 14일 소련군 사령관 로마넨코 소장이 평양 시민들 앞에서 '김일성 장군'이라고 그를 소개하였다.

'김일성'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계기는 보천보전투 때문이다. 보천보전투는 동북항일연군 가운데 김일성이 이끄는 일부 병력이 1937년 6월 4일 함북 갑산군 혜산진 보천보 일대를 잠시 점령한 사건이다. 남한에서는 한때 김일성 주석이 실제 보천보전투를 이끌었는지에 대한 이른바 '가짜 김일성' 논란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전투를 김일성의 항일 경력으로 인정하는 추세이다.

김일성은 북한으로 입성한 직후인 8월 26일부터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개시하였다. 첫 번째로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반씩 구성하여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은 공산당의 혁명전술로써 처음에는 민족진영의 인사와 공산진영의 인사가 동등한 합작전략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후에 점차 공산진영 인사의 수를 늘려 결국 공산진영 독점체제를 만들어 북한의 관리와 조직을 구성해나갔다.

두 번째로, 조선노동당(朝鮮勞動黨)을 조직하였다(1945. 10 .10). 처음에는 북한만의 지역성을 감안하여 북조선노동당(北朝鮮勞動黨)이라고 하였으나, 1949년 6월부터 남북의 세력을 통합한다는 의미에서 조선노동당으로 개칭하였다. 세 번째로, 1946년 2월부터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고, 김일성이 인민위원장이 되어 공산정부 수립 전까지 전권을 행사하였다.

네 번째로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남한의 국회의원과 같음)을 선출하여 인민공화국 헌법을 공표하였고(9월 2일), 곧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1948. 9. 9). 김일성은 북한으로 들어와 1당 독재·1인 독재·1족 독재 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하였다.

소련에서 귀국하여 국내에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실권 구축을 위해 더욱 숙청을 과감하게 진행하였다. 민족주의자(조만식 曺晩植), 국내파 공산주의자(현준혁 玄俊赫, 박헌영 朴憲永), 중국출신 연안파(延安派 중국 공산당이 옌안[延安]으로 퇴각하여 세력을 키울 때, 그와 연계하여 성장한 한국계 공산주의자)(윤공흠 尹公欽 등)와, 소련계(허가이 許哥而)를 차례로 제거하였다.

특히 합작하여 활용한 다음 위험스럽게 생각되면 측근까지도 제거해버렸다. 김일성의 북한 통치는 다음의 3단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제1단계는 1945 ~ 1950년대의 폭력혁명기이다. 김일성은 국내로 들어와 기반을 다지고 독재체제를 구축하며 경쟁세력을 숙청하고, 남한까지 공산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6·25 전쟁을 도발하였다.

제2단계는 1960년대로, 이념적으로 공산주의 기본 역사관인 유물사관(唯物史觀)에 충실한 시기이다. 이른바 맑스-레닌주의에 몰입하여 강력한 공산혁명을 추진하였다. 자본주의(資本主義)는 자체모순에 의해 자멸하고 결국 사회주의(社會主義)로 전환된다는 신념 하에, 인류 역사는 물질과 계급에 의해 진행된다는 이념으로 무장하여, 강력한 공산주의 체제를 구축하고 인민들을 교육하였다.

제3단계는 1970년대 이후의 시기로, 공산권 내부의 변화 및 국제관계의 변화로 북한이 자주노선을 취한 시기이다. 소련으로부터의 지원이 단절되거나 소련 내부의 공산주의 평가 분위기 변화 그리고 중국에서의 문화혁명과 그 후의 평화 외교 등이 원인이 되어 독자노선을 택한 것이다.

이때부터 주체사상(主體思想)이라는 새로운 독자적 이념을 강조하여, 김일성 사상으로 무장한 폐쇄적이고 독재적인 공산주의를 강화하였다. 김일성은 1족 독재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김정일(金正日)에게 정치 경험을 쌓게 한 후 후계자로 삼았다. 그러나 말년에는 부자 간의 갈등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1994년 7월 묘향산으로 휴양을 갔다가 동월 8일 심근경색증으로 급작스럽게 사망하였다.

최근 김정일 이후를 대비한 후계체제 구축은 김일성에서 김정일로의 후계체제 구축과정에서 확립한 혁명계승론과 혈통계승론 등의 후계자론에 따라 아들에게 후계수업을 받게 한 후 이 중 한 사람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위로부터 후계체제를 정비해 나가는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

만경대 3대 위인(김형직 김일성 김정일), 백두산 3대 장군(김일성 김정숙 김정일) 등 북한의 혁명 가계론에 따르면 김형직-김일성-김정일-김정일 아들(김정남 김정철 김정은)로 이어지는 후계구도를 우선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데, 3남인 김정운이 후계자로 간택된 것으로 보인다.

1) 김정숙 (김일성의 첫번째 부인이며, 김정일의 생모이다, 1917년생~1949년 사망) :

김정숙(金貞淑)은 김정일의 생모로 1917년 12월 24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하여, 1949년 9월 22일 평양에서 사망했다. 북한의 문헌에 의하면 1933년부터 반일활동에 참여했고, 1935년 항일유격대에 관여했다.

1937년 압록강 상류의 창바이현에서 당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 부대장이었던 김일성의 조국광복회 지하공작사업을 수행하던중 체포되었다. 석방된 후에 다시 항일유격대로 들어가 김일성부대의 작식대원으로 활동하였다. 1942년 2월 김정일을 낳았고 8·15 해방후 평양에 와서 1946년에 딸 김경희를 낳았으며, 1949년 3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① 김정일 (김일성의 첫째 아들, 현 국방위원장 겸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1942년생~) :

김정일(金正日)은 1942년 2월 16일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에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는데 북한의 공식 발표로는 백두산 밀영지의 귀틀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평양의 제1초급중학교를 거쳐 1960년 고위층 자제들이 다니는 남산고등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64년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1967년 당의 핵심 부서인 조직지도부 과장을 거쳐 1971년 부부장으로 승진하였고, 1973년 중앙당 문화예술부장을 거쳐 중앙당 조직 및 선동선전담당비서라는 막강한 지위에 올랐다. 1974년 당 정치위원회 위원(현 정치국원)이 되면서 후계자로서의 기반을 공고히 다졌다. 이때부터 '지도자동지', '당중앙'이라고 호칭되었으며 1975년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비서국 비서,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공식적인 제2인자의 위치를 굳혔다. 이때부터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로 호칭이 변경되었다. 1991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1993년 국방위원장에 선출되어 군권을 완전 장악하였으며, 1994년 7월 김일성이 죽자 권력을 승계하였다.

1997년 당 총비서가 되었고, 1998년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헌법 개정을 통해 주석제를 폐지하고 권한이 더욱 강화된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되었다. 2008년 여름 뇌졸중을 앓았으며 최근 자신의 셋째 아들인 김정은을 후계자로 낙점했다.

② 김경희 (김정일 누이동생이며, 현 노동당 경공업부장, 1946년생~) :

김경희(金敬姬)는 1946년생으로 김정일 누이동생이며, 현 노동당 경공업부장이다. 남편은 당 행정부장 겸 국방위원인 장성택이다. 김경희눈 김정일의 최측근으로 북한의 경제정책에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알려졌다. 김경희나 남편 장성택 모두 장남인 김정남을 지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경희는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장례식·추모행사에 참석하고 2000년 노동당 창당 55주년 열병식, 20012003년 최고인민회의에 참석해 찍은 기념사진이 공개된 것 외에는 외부에 나타난 사례가 드물다. 최근 김정일의 가극 지도사업을 수행했다고 북한 조선중앙통신의 보도가 있었다.

김정운이 사실상 후계자로 내정되면서 김경희가 언론 매체에 등장한 것은 김정운으로 후계자를 굳힌 김정일이 김정남을 지지하는 김경희를 다독이기 위해 수행을 요청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과 김경희가 '김정운 후계'에 대한 지지를 아예 굳히는 의미에서 수행에 나섰다고 해석이 있다.

* 장성택 (김정일의 매제이며 현 조선노동당 행정부장 겸 국방위원, 1946년생~) :

장성택(張成澤)은 현 조선노동당 행정부장 겸 국방위원이다. 김일성의 사위이며, 김정일의 매제(동생 김경희의 남편)이다. 장성택은 1946년 강원도 천내군의 아주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김일성 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재학 중 동기생인 김경희(김정일의 여동생)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다.

장성택은 1972년 당 조직지도부 과장을 거쳐 1981년경에 당 청년 사업부로 자리를 옮겨 부부장, 제1부부장(1985년) 및 부장(1989년)을 거쳐 1989년 6월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 1990년 4월 최고인민회의 9기 대의원, 1992년 12월 당 중앙위원회 위원, 1994년 7월 김일성 국가 장의위원회 위원, 1995년 11월 당 조직 지도부 제1부부장에 오르는 등 북한에서 그의 신분은 초 수직상승이었다.

2004년 당 조직지도부 고위간부 자녀의 호화 결혼식에 그와 가까운 인물들이 대거 참석한 사실이 밝혀져 잠시 실각했다가 2005년 12월에 다시 노동당 근로단체 및 수도건설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고, 2008년 9월 당 조직 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복귀했다. 김정일 와병설(2008년) 이후 당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를 중심으로 후계구도 구축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최근 제12기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방위원으로 선임된 것은 당에 이어 군까지 후계자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된다. 최근에는 김정은을 후원하는 것으로 알려진 장성택은 김정일의 권력이양 과정에서 완벽한 후계구도가 만들어지기 전까지의 유일한 김정일의 권력대행자로 평가되고 있다.

2) 김성애 (김일성의 두번째 부인, 1924년생~) :

김성애(金聖愛)는 1924년 평안남도 강서군 출생으로 김일성의 두번째 부인이며, 부수상을 지낸 김광협(金光俠)의 동생이다. 평양여자사범학교를 중퇴하고 1954년 조선민주여성동맹 순안군 위원장, 1957년 중앙호위부 비서를 지냈다. 김정일의 이복동생 김평일을 낳고 1963년 김일성과 정식으로 결혼했다.

1965년 조선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 1971년 위원장이 되었으며, 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뽑혔다. 1973년 콩고대십자훈장, 1982년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0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위원이 되었으나 김 주석 사망 3년 후인 1998년 4월 여맹 위원장에서 해임된 이후 현재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자신의 아들인 김평일 주폴란드 북한대사를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해 김정일과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였으나 결국 밀려났다.

① 김경진 (딸, 1951년생~) :

김경진은 1951년생으로 김평일 대사의 친누나이며, 김정일의 이복누나이다. 남편은 김광섭 주오스트리아 북한대사이다.

② 김평일 (김일성의 둘째 아들, 1954년생~) :

김평일은 1954년생으로 김일성의 둘째 아들이며, 김정일의 이복남동생이다. 김일성 종합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상위로 임관, 김일성군사종합대를 거쳐 호위사령부 장갑차 대대장으로 근무했다. 김정일이 1974년 후계자로 공인된 후 1979년 유고 주재 북한대사관 부무관으로 임명되어 평양을 떠났다. 이때 김경진은 남편과 함께 체코로, 김영일은 동독으로 떠났다.
이후 김평일은 1988년 헝가리 대사로 임명됐으나 그해 12월 한국과 헝가리가 수교하자 곧바로 불가리아 대사로 임명되었고, 1994년 핀란드 대사를 거쳐 1998년부터 폴란드 주재 대사로 활동해왔다. 아내인 김순금(1954년생)과의 사이에는 김은송(딸, 1982년생)과 김인강(아들, 1984년생)이 있다.

③ 김영일 (김일성의 셋째 아들, 1955년생~2000년 사망) :

김영일은 1955년생으로 김일성의 셋째 아들이며, 김정일의 이복남동생이다. 일주재 북한 이익대표부 참사관을 지내다가 2000년에 사망했다.

< 김정일 가계도 >

1) 성혜림 (김정일의 첫번째 부인, 1937년생~2002년 사망) :

성혜림은 1937년 경상남도 창녕군에서 태어났다. 1955년에 평양연극영화대학에 입학했으며, 1960년에 만들어진 온정령, 백일홍에서 등장하기도 했다. 월북 작가 리기영씨의 장남 리평씨와 결혼해 딸을 낳았으나 1960년대 후반 문예부문을 지도하던 김정일의 눈에 들어 남편과 이혼하고 김정일과 살다가 1971년 첫 아들 김정남을 낳았다.

당뇨병 등 지병으로 러시아를 비롯해 해외에서 오랫동안 치료받다 2002년 5월 모스크바에서 65세로 사망했다. 북한은 성혜림의 장례식에 아무도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① 김정남 (김정일의 첫째 아들, 1971년생~) :

김정남은 김정일의 첫번째 아들로 1971년 성혜림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때 장남 김정남이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되며 10대 중반에 북한컴퓨터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24세의 나이에 인민군 대장 계급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이모인 성혜랑이 미국으로 망명하고 자신도 2001년 위조여권으로 일본에서 추방당하는 등의 돌발행동으로 후계 구도에서 멀어졌다.

전문가들은 김정남이 자본주의에 물들여 졌기 때문에 김정일의 신임을 받지 못한 것으로 분석했다. 또한 최근 이복동생인 3남 김정은이 후계자로 확정됨에 따라 후계구도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셋째 김정은을 정점으로 하는 후계체제 구축 작업이 급속히 진행되면서, 김정남 주변 인사들에 대한 숙청 작업도 일부 시작된 것으로 보여 김정남의 중국 망명설이 대두되고 있다.

현재 김정남은 북한과 중국·홍콩·마카오 등을 오가며 국가안전보위부 산하 신흥무역회사와 연계해 컴퓨터와 관련 부품, 비료 · 밀가루 등을 해외에서 수입해 이윤을 남기고 되파는 일종의 무역업을 하고 있다.

 

2) 김영숙 (김정일의 두번째 부인, 1947년생~) :

김영숙은 1947년생으로 함경북도 인민보안국 타자수를 거쳐 노동당 중앙위원회 간부부에서 문서원으로 일하다 1973년 김일성의 소개로 김정일과 정식 결혼했다. 김영숙과의 사이에는 김설송, 김춘송 등 3명의 딸이 있으며, 현재 김정일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① 김설송 (1973년생) : 외부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② 김춘송 (1975년생) : 외부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③ 미상 (막내딸) : 외부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3) 고영희 (김정일의 셋째 부인, 1953년생~2004년 사망) :

고영희는 1953년생으로 재일교포 출신이다. 북한 평양만수대예술단 무용수로 활약했던 70년대 중반 김정일과 동거를 시작한 이후 사망 전까지 사실상 북한의 퍼스트 레이디였다. 고영희는 김정일과 사이에 1981년에 차남 김정철을 낳았고, 1984년에 삼남 김정은을 낳았으며, 1987년에 딸 김여정을 낳았다. 2004년 6월 유선암으로 사망했다.

① 김정철 (김정일의 둘째 아들, 1981년생~) :

김정철은 1981년생으로 김정일의 둘째 아들로, 장남인 김정남이 후계구도에서 멀어진 후 후계자로 유력하다는 분석이 많았다. 김정철은 1990년대 후반 동생인 김정은과 함께 스위스 국제학교에 다녔으며, 2006년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턴의 공연 관람차 독일을 찾았고, 스위스 베른국제학교 유학 시절에 미 프로농구단 시카고 불스의 티셔츠를 입은 그의 사진이 공개된 바도 있다. 최근 후계구도에서 밀려난 것으로 분석된다.

② 김정은 (김정일의 셋째 아들, 1984년생~) : 김정일의 후계자

▲ 김정은의 16세 때 사진

최근 김정일의 후계자로 거의 확정된 3남 김정은은 1984년생으로 키가 167 센티미터 정도이며, 성격과 외모가 김정일을 빼닮아 김정일의 신임이 대단하다. 김정은은 스위스 국제학교에 다닐 때 마이클 조던과 일본 만화를 좋아해 남한 학생들과도 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마이니치(每日)신문 기사에 의하면 1996년 여름부터 2001년 1월까지 스위스 베른의 공립중학교를 '박운'이라는 가명으로 다녔다고 한다. 당초 형인 정철(正哲)이 다니고 있던 베른 국제중학교에 입학했으나 몇달 뒤 인근 초등학교로 옮겨 독일어 등을 공부한 뒤 1998년 8월 공립중학교에 7학년으로(중학교 1학년에 해당)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③ 김여정 (딸, 1987년생~) : 외부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4) 김옥 (김정일의 네째 부인, 1964년생~) :

김옥은 1964년생으로 김정일의 네번째 부인으며, 김정일의 셋째 부인인 고영희의 막내아들인 김정은을 미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영희씨의 사망 전에는 김 위원장의 서기실 과장 직함을 갖고 김 위원장의 각종 국정을 도왔고, 고씨 사망 이후에는 사실상 `퍼스트 레이디'로서 국정을 보좌하면서 권력의 중심에 서있다.

* 미상 (딸, 2008년생) : 외부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