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phecy

차길진의 미스터리Q- 청와대 터는 결코 명당이 아니다

Gedeon 2009. 9. 21. 21:46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차례 밝혔지만 청와대 터는 사람의 터라기보다 신의 터다. 극단적으로 과장해 표현하자면 사람이 살 자리가 아니란 얘기다. 사람 터가 아닌 곳에 대통령 관저를 세웠으니 늘 화가 발생할 수밖에. 이런 청와대 터의 저주를 피할 길은 없을까.

원래 청와대는 경복궁 내전이 있던 자리다. 북한산 세력권인 북악산 앞마당에 세운 경복궁에서는 피비린내가 계속됐다. 그 시작이 1398년 태조 7년 이방원의 왕자의 난이었다. 하필 이방원은 경복궁 터를 잡은 정도전을 경복궁으로 불러 참살한다.

연산군 때 경복궁은 유흥의 놀이터로 전락한다. 하루도 곡연(曲宴)이 없는 날이 없었다. 연산군은 갑자사화를 일으켜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신하들을 죽이며 왕권을 과시했지만 결국 중종반정으로 폐주가 된다.

임진왜란으로 불탄 경복궁은 한동안 폐허로 방치되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됐다. 대원군의 며느리이자 정치적 숙적이었던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1895년 시해당하고, 이어 고종, 순조도 차례로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경복궁 후원인 현 청와대 터에 조선총독관저를 세운 일본도 예외가 아니었다. 청와대 터에 처음 들어온 총독은 제 3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 1919년 9월 2일, 총독 부임식에서 강우규 의사가 그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운 좋게 살았지만 정무총감, 일본경찰 등 37명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다시 송학순 의사가 순종 성복제에서 그를 죽이려 했으나 또 실패한다. 2번이나 살아난 사이토는 승승장구하며 일본 총리까지 오르지만 청와대 터의 저주는 피하지 못했다. 젊은 일본인 장교들에 의해 발생한 2.26 쿠데타로 목이 잘린 채 무참히 살해되고 만다.

사이토 뒤를 이은 야마나시 한조는 돈을 받아 챙기는데 도가 튼 사람이었다. 육군대장 출신인 그의 별명은 '배금장군'일 정도. 결국 야마나시 총독 매직(賣職) 사건에서 5만원을 받은 게 드러나 책임을 지고 물러나 죽을 때까지 칩거했다.

7대 총독 미나미 지로는 최악의 일본 총독이었다. 창씨개명, 내선일체, 지원병제도로 대표되는 탄압과 민족 말살정책을 주도했다. 결국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극동 국제군사재판은 미나미를 A급 전범으로 판정, 종신 금고형에 처한 뒤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이듬해 사망한다.

8대 고이소 구니아키는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투옥돼 옥사했고, 마지막 총독인 아베 노부유키는 1945년 8월 15일 항복문서에 서명한 뒤, 아내와 손자 둘을 데리고 부산항에서 일본행 배를 탔다가 폭풍이 퇴로를 막아 간신히 목숨만 건진 채 부산으로 돌아오지만 그의 80t급 배에 실렸던 재물은 바다 속 깊숙이 수장되고 말았다.

청와대 터는 결코 명당이 아니다. 이 터에 들어온 사람은 해를 당할 확률이 높다. 허나 피할 길이 없는 것도 아니다.


(hoo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