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eligion

유다복음 에세이

제자로서 예수를 배신하고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기여했던 가롯 유다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악한 자로 낙인 찍힌 인물이다. 2천년 가까이 반역과 속임수의 대명사로 불렸던 가롯 유다, 바이블은 그를 용서받지 못할 배신자, 그리고 마귀와 내통한 사악한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거의 2천년이 지난 지금에 고대의 복음서 하나가 이집트 사막속에서 홀연히 나타나 현대인들에게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가롯 유다의 악명 높은 입맞춤을 묘사한 그림

4세기초, 초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가 대량으로 불태워졌는데 이는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부제의 명령에 따라 유대교 경전에 그리스도 복음이 추가되어 새로운 경전, 즉 바이블이 편찬되면서 이 새로운 성서에 위배되는 복음서들을 모두 몰수하여 없애버린 일이다. 그 중 대량이 초기 크리스찬들이였던 그노시스파가 전파한 예수의 복음서들이다. 그런데 그때 없어진 초기 복음서들 중에 최고의 이단으로 몰렸던 유다 복음서가 1978년 이집트 사막의 한 동굴에서 부서져가는 파피루스 책자로 발견되어 배신자 가롯 유다에 대한 새로운 측면을 보여주게 되었다.
 

유다복음은 "예수가 유다와 나눈 비밀스런 이야기"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등 신약성경의 4대 복음과 달리 유다가 예수의 요구에 의해 어쩔수 없이 예수를 배반하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어 많은 논란을 불러오고 있다. 유다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당시 유대교 율법을 따르던 제자들의 신앙을 비웃었으며 그들이 숭배하는 신의 의미를 새로이 부각시킴으로서 사도들에게 혼란을 주었다. 이는 곧 예수를 향한 그들의 분노로 이어진다. 하지만 오직 유다만이 예수의 메시지를 이해함으로서 예수의 총애를 받게 되는데 그 이유로 유다는 다른 제자들로부터 미움을 사게 된다.

 2천여년의 세월동안 건조 되어 부서져 가던 고대 파피루스 문서 '유다 복음서'가 1978년 이집트 사막 동굴안에서 발견 되었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성장할 당시 30권이 넘는 그리스도의 복음서가 대중에 유통 되었으며 유다복음은 이들과 함께 널리 읽혔던 복음서 중 하나이다. 하지만 서기 180년경 프랑스 리옹의 이레나에우스 주교에 의해 예수의 신비스런 영지주의 메시지가 담긴 복음서들은 꾸며진 이야기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보다 심플한 예수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담긴 복음서외에는 모두 이단으로 책정되기 시작했다. 이레나에우스 주교가 처음으로 공격한 복음서는 바로 유다 복음서이다. 그는 당시 유다복음은 주류 기독교 내용과 다르다며 꾸며진 얘기로 비판했고 어떡해서든지 유다 복음서가 유통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유다복음의 핵심은 유다가 예수의 부탁을 받고 예수로 하여금 육신의 짐을 벗어던질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예수를 영적인 존재로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예수의 부활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음이 유다 복음서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유다복음에 대한 박해는 새로운 율법과 교리와 함께 기독교가 자리를 잡아가던 서기 180년경 시작되어 150여년간 지속되었는데 결국 4세기에 이르러 콘스탄티누스의 바이블 편찬에 끼지 못하고 많은 복음서들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예수가 죽고 얼마 후 예수의 메시지를 전파했던 자들은 다름 아닌 초기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진 그노시스파였다.  예수가 죽고나서 약 150여년간 활동했던 그노시스파는 예수가 남긴 신비의 메시지를 복음서로 꾸며 전파했는데 그 중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 도마 복음서, 빌립 복음서, 유다 복음서 등이 널리 유통 되었다. 이 복음서들은 예수의 일생을 담은 마가, 누가, 마태, 요한 복음과는 달리 예수가 남겼던 영지주의적 메시지가 기록 되었으며 그노시스파는 이 영지주의 메시지에 깊이 관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훗 날 이 복음서들은 모두 이단으로 몰려 유혈을 부르기도 했다.
  


 
초기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진 그노시스파의 예배를 재현한 모습.
 그들은 교회가 없었으며 집에 모여서 그리스도의 복음서를 읽고 명상에 잠겼다고 한다.

유다 복음서가 초기 기독교 설립시 박해를 받았던 이유는 크게 세가지로 들을 수 있다.


첫째, 당시 주교와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예수를 배반한 사도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기쁜 소식이라는 복음 그 자체에 모순을 주기 때문이다. 바이블이 말해주는 가롯 유다는 예수를 배신했으며 헌금을 훔치는 탐욕스런 악인이다. 그런 그가 복음서의 저자가 되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악의 초상과 그가 치뤘다는 죄의 댓가는 2천년동안 전해져 내려오면서 말로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유다라는 이름 사용을 불법으로 금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애완용 동물 이름으로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죄값을 치루는 가롯 유다를 묘사한 그림. 악마 루시퍼에게 머리부터 잡혀 먹히는 모습이다.

둘째, 당시 유대교 영향을 받은 초기 기독교는 영지주의를 용납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영지주의란 육체보다는 그 안에 존재하는 영성 (Divinity)을 중요시 하는 것이며, 이는 곧 육체안에 존재하는 영성의 불꽃 (Divine Spark)이 신과 일치한다는 신앙이다. 영지주의는 영성과의 연결을 중요시 하는데 인간은 그 영성과 연결된 후 육체로부터 자유롭게 풀려나 생명의 근원인 신과 합쳐지는 것이며 예수가 그것을 행한 대표적인 존재라고 믿는 것이다.
이는 곧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예수 또한 죽음에 연연하기 보다는 육체안에 존재하는 영성의 불꽃과의 연결만을 중요시 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유대교 경전(지금의 구약)을 신봉하는 기독교는 야훼만이 숭배의 대상이고 그는 하나의 인격체를 지닌 인격신이자 유일신이기 때문에 육체안의 영성이 신과 일치한다는 영지주의는 그들에게 사탄을 숭배하는 이단 행위였던 것이다.

세째, 유다 복음서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언급이 없다. 육체의 죽음에 미련을 두지 않았던 영지주의자들에겐 육체의 부활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곧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예수의 부활에 도전장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 그노시스파의 그리스도 복음서들은 이렇게 사상이 다른 유대 경전과 합쳐지게 되는데 이때 영지주의를 논하는 복음서들 30여권이 이단으로 낙인 찍혔으며 바이블 편찬에서 제외 되었다. 나머지 복음서 중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4대 복음서 마가, 누가, 마태, 요한 복음만이 신약에 채택 되었고 이 복음서들과 유대교 경전 구약의 혼합은 삼위일체설로 이루어졌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을 의미하며 곧 예수가 유대교의 신 야훼의 아들로 부각 되었음을 말한다. 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영지주의적이었던 예수를 야훼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지금도 자신들만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서기 325년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한 1차 Council of Nicaea 를 묘사한 그림. 
 2세기초부터 흩어져 돌아다니던 경전과 복음서들을 한군데 모아 바이블을 편찬하기 위한 첫 모임이다.

이렇게 사상이 다른 두 경전이 합쳐지면서 바이블이 탄생했고, 이와 더불어 기독교 유대인들과 유대교 유대인들 사이에 불화가 일어 났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더 나아가 중세때는 바이블이 교회 지도자들의 정치적인 도구로 악용 되면서 크나큰 유혈을 부르게 되었음이 기독교 역사에 기록 되어 있다.

초기 기독교 내부에는 유다의 역할이 예수의 예언을 완성하는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유다를 박해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학파가 존재했으며 현재 많은 기독교 학자들 또한 새로이 발견 된 유다 복음서가 예언의 완성에 있어 유다의 역할이 핵심적이었다는 관점을 뒷받침해 줄 것이라며 유다 복음서에 대한 우호적인 평을 내리고 있다.


Reference: The Gospel of Judas by National Geography, Emperor Constatine and the Bi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