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古書)에 나타난 전라도 풍속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 밖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반대방향으로 뻗었고 따라서 인심도 그러하니 그 아래 있는 주군 사람들이 국사에 참여하거나 왕후·국척들과 혼인을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혹은 국가에 변란을 일으킬 것이요, 혹은 백제를 통합한 원한을 품고 왕실을 침범하여 난을 일으킬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지방 사람들로서 일찍이 관가의 노비나 진(津)·역의 잡척(雜尺)에 속하였던 자들이 혹 세력가들에 투탁하여 자기 신분을 고치거나 간교한 말로서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재변을 초래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방 사람들은 비록 양인일지라도 관직을 주어 정치에 참여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 고려 태조 왕건
"전주절도사 조용겸(趙容謙)이 야인의 옷차림으로 임금의 행차를 맞이하였다. 박섬(朴暹)이 아뢰기를, 전주는 곧 옛 백제로서 성조(태조)께서도 미워하셨으니 주상께서는 행차하지 마소서." 하니, 왕이 옳다 여겨......." 고려사 1011년 현종
"호남지방은 산수마저도 무너지고 달아나는 듯하여 정이 들지 않는다" 정도전
"전라도는 산수가 배치하여 쏠리고 인심이 지극히 험악하다." 세종 22년 조선왕조신록
"전라도는 옛 백제(百濟)의 땅인데, 백성들이 견훤(甄萱)이 남긴 풍습을 이제껏 모두 고치지 못하였으므로, 그 풍습이 이와 같은 것이다." 성종대왕
"호남의 풍속이 가장 잡술을 숭상한다고..." 영조대왕
"본래 양수척(고려시대 천민)은 태조가 백제를 공격할 때에도 제어하기 어렵던 사람들의 후손인데 본시 관적(貫籍)도 부역도 모르며 즐겨 수초(水草)를 따라서 유랑 생활을 하면서 사냥이나 하고 버들 그릇을 엮어서 팔아 먹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다." 고려사
전라도는 산수가 모두 산발체(散髮體)를 이루면서 흩어져 나가 국면(局面)을 이루지 못하므로, 그 지방에는 재주와 덕행이 드물고 인정도 고약하다 하였다. - 성호 이익
"노비,기생등 천민들은 양수척에서 나왔다" 정약용
"도덕윤리에 대한 이들의 시각은 별로 엄격하지 않은데, 이들은 서로를 믿지 않으며 남을 속이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남을 속여 이득을 취하는 것을 대단한 능력으로 여긴다."
- 헨드릭 하멜, 하멜표류기 중에서 전라도에 대해-
《 성종 214 19/03/02(병인) / 장령 김미가 이원을 복직시키는 명을 거둘 것과 유향소 설치를 아뢰다 》
김미(金楣)가 또 소매 속에서 글을 내어 올리니, 그 글에 이르기를,
"전라(全羅) 1도(道)는 옛 백제(百濟)의 터[墟]이니, 그 유풍(遺風)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완한(頑悍)한 풍속이 다른 도(道)에 비하여 더욱 심합니다. 그 도적(盜賊)은 혹 집에 불을 지르거나 혹 길가는 사람을 저격(狙擊)하여 대낮에 양탈(攘奪)하므로 세상에서는 이르기를, '호남(湖南)의 습속은 강도(强盜)는 있어도 절도(竊盜)는 없다.'고 하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또 왜복(倭服)에 왜어(倭語)를 하는 수적(水賊)이 있어 해포(海浦)에 출몰(出沒)하면서 몰래 행선(行船)을 엿보고 있다가 배 안에 있는 사람을 다 바다에 던지고 몰래 도서(島嶼)에 숨고 하여 마치 귀신과 물여우와 같으므로 관리(官吏)가 비록 수포(搜捕)하려고 하더라도 누구를 어찌할 수 없으니, 이것은 다른 도에 없는 일입니다.
그 죄를 범하고 도망하여 숨는 자는 세력 있는 백성[豪民]과 교활한 관리[猾吏]가 서로 표리(表裏)가 되어 긴 울타리에 겹문을 만들고 다투어 굴혈(窟穴)을 지어 줍니다. 만일 본주(本主)가 근심(根尋)하는 자가 있으면 공금(公禁)에 참여하지 않고, 심한 자는 혹 불량한 무리를 모아 본주(本主)를 구축(퉽逐)하여 상처를 입혀서 가도록 하니, 이것 또한 다른 도에 없는 일입니다. 그 귀신(鬼神)을 숭상함에 있어서는 강만(岡蠻)·임수(林藪)가 모두 귀신 이름이 붙어 있으며, 혹 목인(木人)을 설치하거나 혹 지전(紙錢)을 걸어 생황(笙簧)을 불고 북[鼓]을 치며, 주적(酒炙)이 낭자(狼藉)하고 남녀(男女)가 어울려서 무리지어 놀다가 노숙(露宿)하면서 부부(夫婦)가 서로 잃어버리기까지 하여도 조금도 괴이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음일(淫佚)을 좋아함에 있어서는 여항(閭巷)의 백성이 처첩(妻妾)을 서로 도둑질하고 서로 원수가 져서 첩소(牒訴)가 고슴도치의 털처럼 복잡합니다. 심지어 기공(期功)의 친(親)을 보기를 범인(凡人)과 같이 하여, 혹 아우가 형의 첩(妾)을 상피 붙고, 종[奴]이 주모(主母)를 간통하여서 인륜(人倫)을 무너뜨린 자가 간혹 있으며, 사치(奢侈)스러운 풍속을 논(論)하면 여염(閭閻)과 읍리(邑吏)의 의복(衣服)이 곱고 화려하며, 시골의 천한 백성들은 음식(飮食)을 물퍼쓰듯이 해먹으므로, 풍년(?年)에 절재(節栽)할 줄을 모르고 한 번 흉년(凶年)을 만나면 강보(襁褓)의 어린아이까지 유리(流離)합니다.
능범(陵犯)하는 풍속은 아랫사람이 웃사람을 업신여기고, 천(賤)한 이가 귀(貴)한 이에게 행패를 부리며 병졸이 장수를 모함(謀陷)하고 이민(吏民)이 수령(守令)을 꾸짖어 욕하며, 명예를 구하고 분수를 범함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근일(近日)에 광산(光山)에서 군수[쳓]를 사살한 일은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대저 이 여섯 가지는 모두 다른 지방에 없는 풍속이니, 개혁(改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臣)이 김제 군수(金堤郡守)로 6년을 재임(在任)하였으므로 외방(外方)의 치체(治體)를 갖추 알고 있습니다. 감사(監司)가 된 자는 비록 그 폐단을 통렬히 혁신(革新)하려고 하여도 1년 안에 겨우 한 두 번 순행(巡行)하니, 수령(守令)의 현부(賢否)를 알 수가 없는데, 어느 겨를에 풍속을 고쳐 박(薄)한 것을 뒤집어서 후(厚)한 데로 돌아가게 하겠습니까?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만일 나를 써주는 이가 있다면 단 1년으로 나라를 바로잡고, 3년이면 성과를 올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성인(聖人)의 덕(德)으로써도 1년 동안에는 크게 다스릴 수 없고 3년이라야 성과를 올릴 수 있거늘, 하물며 그만 못한 자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강명 정대(剛明正大)한 자를 택(擇)하여 감사(監司)를 삼되, 그 임무를 오래 맡도록 하여 3년이 지나서야 체차(遞差)하면, 완한(頑悍)한 풍속이 점점 혁신 될 것입니다. 혹은 또 말하기를, '예전에는 1향(鄕) 가운데에 정직(正直)한 품관(品官)1, 2원(員)을 택하여 향유사(鄕有司)를 삼아서 풍속을 바로잡게 하고 이름하기를 유향소(留鄕所)라고 하였었는데, 혁파(革罷)한 이래로 향풍(鄕風)이 날로 투박(큢薄)하여졌다.'고 합니다. 신(臣)의 생각에도 다시 유향소(留鄕所)를 세워, 강직한 품관을 택하여 향유사(鄕有司)를 삼으면, 비록 갑자기 야박한 풍속을 변모시킬 수는 없더라도 또한 향풍(鄕風)을 유지(維持)하여 완흉(頑兇)한 무리가 거의 조금은 그칠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고 물었다. 영사(領事) 윤필상(尹弼商)이 아뢰기를,
"감사(監司)의 임기(任期)를 3년으로 하자는 법은 만일 그가 어질면 가(可)하나 혹 용렬(庸劣)할 것 같으면 폐단을 백성에게 끼칠 것입니다. 또 풍속(風俗)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변모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고, 김미(金楣)가 말하기를,
"감사(監司)가 1기(期) 안에 순행(巡行)함이 2, 3차(次)에 불과(不過)하니, 풍속의 박악(薄惡)함을 어느 겨를에 다스리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정승(政丞)의 말이 매우 옳다." 하였다. 김미(金楣)가 말하기를, "예전에도 유향소(留鄕所)가 있었으니, 만약에 다시 세우면, 완은(頑?)한 무리는 방자(放恣)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윤필상이 말하기를,
"혹은 유향소(留鄕所)가 향풍(鄕風)을 유지하는 데에 유익(有益)하다고 이르고, 혹은 유향소(留鄕所)에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백성이 도리어 폐단을 받는다고 이릅니다. 대저 법(法)은 스스로 행하지 못하고 사람을 기다려서 행하니, 요(要)는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을 적임자를 얻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이 도(道)를 넓히는 것이요, 도(道)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니, 관리가 봉행(奉行)하지 않으면 비록 신법(新法)을 세운다 하더라도 어찌 유익하겠는가? 풍속(風俗)이 박악(薄惡)함은 마땅히 점차로 다스릴 것이다." 하였다.
성종대왕이 평가한 전라도와 경상도
백제가 가장 사치함을 일삼아 군장이 된 자가 올바른 방법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교사하고 음탕하며 술을 좋아함이 상하가 비덕하여 재물이 바닥이 나고, 힘이 고갈되어 마침내 망하는 데에 이르렀다. 지금의 전라도는 곧 그 옛땅으로서 그 연회와 상장에서 그 예도를 따르지 않고, 완악한 기풍과 흐려진 풍속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남아 있다. 신라는 풍속이 근검을 힘쓰고 화려하게 꾸미기를 일삼지 아니하여, 집안이 넉넉하고 나라가 부하였으며, 상하가 서로 편안하여 천여 년을 계속했으니, 지금 경상도가 곧 그 구지로서 순후한 기풍과 질박한 풍속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서로 전한다. 그래서 이름하여, '다스리기가 쉽다.' 한다. 안동 사람의 경우는, 부지런함을 힘쓰고 고생을 참으며, 가을과 겨울에는 죽을 먹으면서 농사지을 달에 쓸 것을 저축하므로 범백의 비축이 준비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집집마다 서로 본받고 사람마다 스스로 노력한다. 이렇기 때문에 안동은 영남에 있어서 그 땅은 더욱 박하지만 비록 흉황을 만나더라도 백성이 유리하지 아니하니, 어찌 복근과 절용의 효과가 아니겠느냐?
성호사설 제8권 인사문 <생재>
전라도(全羅道)는 서쪽과 남쪽은 모두 바다이고, 동쪽은 대령(大嶺)이 경계(境界)이다.
사람들은 방술(方術 방사 술법)을 좋아하고 과사(夸詐 큰소리치고 남을 속이는 것)를 잘한다.
전주(全州)는 감영(監營)이 있는 곳이다. 장사꾼이 더욱 많아 온갖 물화가 모여든다. 생강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데, 지금 우리나라 전역에서 쓰는 생강은 모두 전주에서 흘러나온 것이다.풍속이 사나워서 나그네가 잠자리를 얻을 수 없는데, 전주가 가장 심하고, 기질(氣質)이 나약해서 추위와 주림을 참지 못하는 것은 도내(道內)가 모두 마찬가지다.
곡식이 흔하기 때문에 강호(强豪)들이 재물 모으기가 쉬워서, 좋은 옷에 좋은 말 탄 호족(豪族)들이 곳곳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약한 백성을 괴롭히지만, 관(官)에서도 금할 수 없는 상대가 더러 있다.
그러므로 객호(客戶 타향에서 온 사람의 집 또는 사람)를 고용(雇傭)하여 제멋대로 종이라 칭하고, 갓 쓰고 도포(道袍) 입고서 선비[儒士]인 체하여 점병(點兵)에도 참여하지 않는 자가 3분의 2나 된다.
그 나머지 3분의 1만을 문부(文簿)에 적어 역사에 조발(調發)하므로, 그 역사가 과중하여 세민(細民 빈천한 백성)들은 제집 일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3형제를 둔 집에서는 아들 하나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역사를 피하게 하기 때문에 도내 곳곳에는 대소(大小)의 사찰(寺刹)이 널려 있다.
중들은 농사를 하지 않고 민가(民家)에서 얻어 먹으니, 농사를 해침이 더욱 심하다.
중들이 하는 일은 신을 삼고 종이를 만드는 것이 고작이다.
조선시대 지리학자들은 조선 팔도의 풍수지리적 해석을 하면서, 땅이 인간의 심성에 미치는 영향을 논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하여, 지리인성론(地理人性論)이 발달해 왔는데, 학자들 사이에 상당한 의견의 일치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 그대로 수용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사회로 변화하면서 수많은 인구이동과 지역간의 교류가 활성화되고, 문화공간이 확산되면서 과거와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이해하시고 여기서는 풍수지리설의 입장에서 참고만 하시기를 바랍니다.
가. 나학천(羅鶴天)의 팔도 인물평
임진왜란 때. 이여송의 지리참모로 조선에 왔던 두사충(杜師忠)의 사위인 나학천은 중국 남경의 건주(建州) 출신으로 장인과 함께 조선에 귀화한 인물이다. 그는 조선 팔도의 형상을 인체와 동물에 각각 비유하여 팔도의 인물평을 하였다.
1) 함경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머리(頭,두)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장어다
함경도 사람은 우직하지만 지혜를 가졌다. <우직지협(愚直知夾)>
2) 평안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얼굴(面,면)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매다.
평안도 사람은 의지가 강하고 용감하며 날쌔다. <견강용예(堅剛勇銳)>
3) 황해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손(手,수)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소다.
황해도 사람은 느리고 어리석어 옹골차지 않다. <우준무실(愚蠢無實)>
4) 경기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가슴(胸,흉)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범이다.
경기도 사람은 앞에는 억세고 뒤로는 부드럽다. <선용후유(先勇後柔)>
5) 강원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갈빗대(脇,협)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꿩이다.
강원도 사람은 자기 거처에 가만히 있고 아는 것이 부족하다. <칩복지단(蟄伏知短)>
6) 충청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배(腹,복)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까치다.
충청도 사람은 행동이 경솔하지만 용맹스럽다. <부경용호(浮輕勇豪)>
7) 경상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다리(脚,각)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돼지우리다.
경상도 사람은 어리석고 순하고 질박하지만 참된 기질이 있다. <우순질신(愚順質信)>
8) 전라도는 인체에 비하면 발(足,족)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원숭이다. 전라도
사람은 재조가 있으나 천성이 속이기를 즐기며 교활하며 가볍다.<사교경예(詐狡輕藝)>
나.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의 팔도 인심론
<택리지(擇里志) 복거총론(卜居總論), 인심(人心)편>
무엇으로서 인심을 말할 것인가?
공자께서 "마을의 풍속이 착하면 아름다운 것이 된다. 아름다운 곳을 가려서 살지 아니하면 어찌 지혜롭다 하리오." 하시었고, 옛날.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이나 집을 옮긴 것은 아들을 훌륭하게 가르치고자 함이었다. 사람이 살 고장을 찾을 때에 그 착한 풍속을 가리지 않으면 비단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자손에게도 해가 있어서 반드시 좋지 못한 풍속이 스며들 우려가 있다. 그러니 살 곳을 가리는데, 그 땅의 세상 풍속을 보지 아니하면 안 된다.
우리나라 팔도 가운데 평안도 인심은 순후(醇厚)하여서 제일이요, 다음은 질실(質實)한 경상도 풍속이다. 함경도는 오랑캐와 접경하여 백성이 모두 굳세고 사나우며, 황해도는 산수가 험악한 까닭으로 백성들이 거의가 사납고 모질다.
강원도는 산골짜기 백성으로 몹시 불손하고, 전라도는 오로지 교활함을 숭상하여 그른 일에 움직이기 쉽다. 경기도는 도성 밖의 야읍(野邑)은 백성들의 재물이 시들어 쇠하였고, 충청도는 오로지 세도와 재리(財利)에만 따른다. 이것이 팔도 인심의 대략이다. 그러나 이는 서민을 두고 논한 것이요, 사대부의 풍속에 이르러서는 또한 그렇지 않다.
다. 조선 정조 때 규장각 학자인 윤행임(尹行恁)의 팔도 백성의 성격
1) 함경도 사람은 이중투구(泥中鬪狗)로 진흙 속에 개들이 싸우는 격으로 강인한 의지와 인내력이 있다.
2) 평안도 사람은 맹호출림(猛虎出林)으로 사나운 호랑이가 숲 속에서 나오는 격으로 용맹하고 과단성이 있다.
3) 황해도 사람은 석전경우(石田耕牛)로 돌밭을 일구는 소와 같은 격으로 고난을 이겨내는 근면성이 있다.
4) 경기도 사람은 경중미인(鏡中美人)으로 거울 앞에 선 미인 격으로 이지적이고, 명예를 존중한다.
5) 강원도 사람은 암하노불(岩下老佛)로 바위 아래에 앉아 있는, 부처님 격으로 누가 알아 주든지 말든지 자기 할 일을 해 나간다.
6) 충청도 사람은 청풍명월(淸風明月)로 깨끗한 바람과 밝은 달 격으로 풍류를 즐기는 고상한 면이 있다.
7) 경상도 사람은 태산교악(泰山喬嶽)으로 크고 높고 험한 산 격으로 웅장하고 험악한 기개가 있다.
8) 전라도 사람은 풍전세류(風前細柳)로 바람에 쉽게 흔들리는 버들나무 가지 격으로 시대에 민감하게 적응하면서 살아간다.
라. 성호 이익과 청담 이중환의 영호남 인물 비교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경상도는 산수가 모두 취합하고 바람소리와 풍기(風氣)와 습관 또한 흩어지지 아니하며, 옛날 풍속이 그대로 지켜져 명현(名賢)이 배출되는 국내 최대의 길지(吉地)인 반면, 전라도는 산수가 모두 산발체(散髮體)를 이루면서 흩어져 나가 국면(局面)을 이루지 못하므로, 그 지방에는 재주와 덕행이 드물고 인정도 고약하다 하였다.
반면에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은 그의 저서 택리지(擇里志)에서 전라도의 풍속이 노래와 여색, 부(富)함과 사치를 숭상하고 사람들이 흔히 영리하고 경박하며, 기교를 다하여 문학을 중요시하지 않는 까닭에 과제(科第)에 현달한 자는 경상도에 비해 떨어지나, 인걸은 지령인지라 역시 전라도에도 인재가 적지 아니하다.
《 연산 033 05/05/07(병인) / 전라도 관찰사 안침이 전라도 인심과 풍속이 음탕하고 문란한 것을 엄히 금하기를 청하다 》
전라도 관찰사 안침(安琛)이 아뢰기를,
"본도는 인심이 음란하고 간사하여 남자는 여복으로 변장하고 무당의 버릇을 익혀 사족의 가문을 출입하면서 노래와 춤으로 신(神)을 즐겁게 한다 하며 주야로 그치지 아니하고, 여자는 음탕한 놀이를 좋아하여 산사(山寺)을 돌아다니므로 패속(敗俗)이 막심하오니, 청컨대 엄중히 금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
【원전】 13 집 357 면
【분류】 *풍속-풍속(風俗)
《 성종 055 06/05/17(을축) / 석강에서 궁실 짓는 문제, 전라도의 풍습 등에 대해서 논의하다 》
이맹현이 말하기를,
"전라도는 인심이 각박하고 악하여 도둑이 무리져서 일어나고 아랫사람이 웃사람을 능멸하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풍속은 백년 동안 교화하지 않으면 고칠 수 없으므로, 임금으로서는 마땅히 염려해야 하니, 무릇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죄를 범하는 일이 있으면, 작은 일이라도 용서하지 말고 이런 풍속을 엄하게 징계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라도는 옛 백제(百濟)의 땅인데, 백성들이 견훤(甄萱)이 남긴 풍습을 이제껏 모두 고치지 못하였으므로, 그 풍습이 이와 같은 것이다."
하니, 이극기가 말하기를,
"견훤 이후로 고려[前朝] 5백 년을 지내고 조선조(朝鮮朝)가 되어도서도 거의 1백 년이 되었으나, 남은 풍속이 아직 없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다 완악(頑惡)하니, 명심하고 교화하지 않으면 고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원전】 9 집 227 면
【분류】 *풍속-풍속(風俗) /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건설-건축(建築) / *재정-역(役) / *사법-법제(法制) / *사법-치안(治安)
《 성종 100 10/01/24(신사) / 이극배에게 전라도의 풍속을 물으니 다른 도보다 살상이 심하다고 대답하다 》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임금이 이극배(李克培)에게 이르기를,
"전라도(全羅道)의 풍속(風俗)이 어떠한가? 내가 들으니 백제(百濟)의 남은 풍습이 아직도 없어지지 아니하였다는데, 그러한가?"
하니, 이극배가 대답하기를,
"신(臣)은 구치(驅馳)함에 급하여 자세히 방문(訪問)하지 못하였습니다마는, 듣건대 서로 죽이는 것을 가볍게 여긴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진실로 큰 일이다. 사람이 서로 죽이면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나라에 법(法)이 있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홍귀달(洪貴達)이 아뢰기를,
"대기 습속(習俗)이 강한(强悍)하여 도망한 노비(奴婢)의 연수(淵藪)가 되었으되, 그 주인이 능히 제어하지 못하고, 도리어 능욕(陵辱)을 당하며, 경우 죽기를 면한 자가 자주자주 있으니, 이것은 다른 도(道)에 없는 바입니다."
하니, 이극배가 말하기를,
"서로 다투며 살상(殺傷)하는 것은 비단 이 도(道)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도(道)보다 심할 뿐입니다." 하였다.
《 성종 152 14/03/27(기미) / 의금부에서 조지산의 죄에 대하여 아뢰자 영돈녕 이상에게 의논하도록 하다 》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조지산(趙智山)이 양민을 강압하여 종으로 삼은 죄[壓良爲賤罪]는, 율(律)이 장(杖) 1백 대와 도(徒) 3년에 해당되지마는, 일이 유지(宥旨)가 내리기 전에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영돈녕(領敦寧) 이상의 관원에게 의논하도록 명하니, 정창손(鄭昌孫)·윤사흔(尹士昕)·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
"조지산(趙智山)이 범한 바는 그 죄가 매우 무겁지마는, 그러나 일이 사유(赦宥)하기 전에 있었으니, 그 죄를 소급하여 논죄(論罪)할 수는 없습니다. 송익손(宋益孫)의 예(例)에 의거하여 고신(告身)만 회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윤필상(尹弼商)·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전라도(全羅道) 백성들의 풍속은 다른 도(道)와 비교할 것이 아니어서 옛부터 성질이 완악(頑惡)하였으니, 다만 미천한 백성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품관(品官)의 무리들도 시골에서 세력을 부리어 긴 울타리를 설치하고는 양민(良民)과 다른 사람의 노비(奴婢)를 숨겨 두고서 약탈하여 다른 사람에게 팔고 있습니다. 그래서 풍조(風潮)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모두 이러하니, 이런 풍속은 커지게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조지산(趙智山)이 죄를 범한 것은 사유(赦宥)하기 전에 있었으므로 소급하여 논죄(論罪)할 수는 없지마는, 그러나 완전히 석방(釋放)하고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완악(頑惡)한 풍속을 어떻게 제거시킬 수 있겠습니까? 삼가 성상께서 재가(裁可)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홍응(洪應)은 의논하기를,
《 중종 031 12/12#04(을해) / 사대부의 처첩 관계와 교화를 일으키는 일 및 인재의 등용에 대해 논의하다 》
특진관 홍숙(洪淑)이 아뢰기를,
"근래 재변은 사필(史筆)을 멈출 수 없을 정도로 일어납니다. 비록 《춘추(春秋)》에 실린 것도 오늘날과 같이 심한 적은 없습니다. 신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인심이 강한(强悍)하여 사람을 죽이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그때에 들으니, 경상도는 인심과 풍속이 그렇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경상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보니, 사람 죽이기를 마치 새나 짐승을 죽이듯 하였습니다. 비록 살인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가 중상(重傷)할까 두려워하여 발설하지 못하는 일도 또한 많이 있었습니다.
살인하는 일 뿐만 아니라 인심이 악하고 풍속이 각박함이 말로 다할 수 없었지만, 수령들은 능히 백성을 제어하지 못할 뿐더러 백성들은 수령이 수족을 제대로 놀리지 못하게 하여서, 혹은 없는 일을 가지고 소첩(訴牒)을 올려 호소하기도 하니, 그 인심은 시호(豺虎)나 맹수(猛獸)와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라도 인심의 완악함이 경상도보다 심하다는 것은 본시 말해온 바이지만, 지금은 경상도도 또한 다를 것이 없다. 두 도만 그러할 뿐 아니라 다른 도도 또한 그러하니, 이것은 교화가 아래에 퍼지지 못한 때문이다. 대저 경사(京師)는 전국의 근본인데, 근자에 법사(法司)의 계목(啓目)을 보면 사람죽이는 일이 많이 있다. 먼저 근본이 되는 곳을 바르게 한 다음에야 그 교화가 지방에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원전】 15 집 374 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경연(經筵)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과학-천기(天氣) / *역사-고사(故事) / *역사-사학(史學) / *사법-법제(法制) / *사법-치안(治安) / *사법-행형(行刑) / *인사-임면(任免) / *인사-선발(選拔)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중종 037 14/10/26(병술) / 전라도 재상 어사 장옥이 복명하여 전라도의 민정에 관해 아뢰다 》
전라도 재상 어사(全羅道災傷御史) 장옥(張玉)이 와서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다.
"전라도는 풍속이 거센 고장입니다. 염치를 모를 뿐 아니라, 사람 죽이기를 닭이나 개를 죽이듯이 하고 수령(守令)을 깔보며, 또 남의 무덤을 파내는 것을 보통 일로 생각하므로, 감사(監司)의 뜻은 반드시 경관(京官)을 청해다가 국문(鞫問)하여 조정(朝廷)이 경동(驚動)하는 뜻을 보이고자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요즈음 듣건대, 경기(京畿)에도 그런 일이 있고 외방에는 그런 풍속이 이루어졌다 하나, 감사가 도사(都事)를 시켜서 다스리게 하면 될 것이니 경관을 보낼 것은 없다."
하였다.
【원전】 15 집 574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윤리(倫理) / *왕실-종친(宗親) / *사법(司法)
《 명종 012 06/08/04(기미) / 이조의 건의로 전라도에 정2품관을 감사로 삼아 풍속을 바로 잡도록 하다 》
이조가 아뢰기를,
"전라도는 인심이 사나우며 풍속이 아름답지 못하므로, 그 도의 감사로 반드시 명망과 지위과 높은 사람을 파견한 연후라야 민심을 진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2품 재상으로 의망(擬望)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전라도 인심이 아무리 사납다 할지라도 감사 된 자가 백성을 자기 자식처럼 잘 어루만지고 돌본다면 그 백성들도 부모처럼 사랑할 것이다. 정언각(鄭彦慤)은 실정(失政)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다. 대개 정치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인데 어찌 정2품이라 해서 더하거나 덜하겠는가." 하였다.
【원전】 20 집 34 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人事)
《 명종 018 10/01/04(경자) / 원한으로 부모의 무덤을 파괴하는 전라도의 악습을 치죄할 것을 헌부가 아뢰다 》
헌부가 아뢰기를,
"요사이는 인심이 완악하여 하지 않는 짓이 없으므로 조금이라도 혐의나 원한이 있으면 보복하려고 생각하며 만일 그 사람에게 보복하지 못하게 되면 반드시 그의 부모의 무덤을 파 헤쳐, 자기의 마음을 통쾌하게 합니다.
팔도 중에서 전라도가 이러하여, 앞서는 이미 부원군(府院君) 임백령(林百齡)의 부모 무덤을 파 헤쳤고, 신해년에는 또한 지사(知事) 김인손(金麟孫)의 부모 무덤을 파 헤쳤습니다. 그 당시에 더러는 죄를 다스리고 더러는 죄를 다스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버릇이 아직도 있어서 또 참의 윤인서(尹仁恕)의 아비 무덤을 파 헤쳤습니다.【이때 윤인서가 승지(承旨)였는데, 그의 아비 무덤이 파 헤쳤음을 듣고 성묘(省墓)길을 떠나면서 아뢰기를 '신을 혐오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필시 이 사람의 짓일 것입니다.' 하니, 상이 추국(推鞫)하라고 명했다.】
온 도(道)의 풍습이 이러하니 통렬하게 다스려 폐습을 고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남원 죄수 정전(丁詮)이 윤인서의 아비 무덤 파 헤친 것과 익명서(匿名書)에 관한 일을 이미 하나하나 자복했다가, 결안(結案)을 받을 때에는 일죄(一罪)를 입게 될까 두려워하여 도로 숨었기 때문에 그만 노옥(老獄)이 되어 이제까지 처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도 관찰사로 하여금 시급하게 자복을 받아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니, 그리 하라고 답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는 비록 전라도 풍속이 야박하고 악한 때문이기는 하지만, 필시 그 사람이 세력을 믿고 방자한 짓을 하여 원한 맺는 일을 한 소치가 아닐 수 없으니 그렇다면 그 사람의 행동도 따라서 알 수 있다.】
【사신은 논한다. 윤인서는 자신의 원수 때문에 화가 죽은 아비에게까지 미쳤으니, 반성하여 자신을 책망하며 애통하기를 겨를 없이 해야 할 것인데, 도리어 자신의 원한을 통쾌하게 갚으려 하여 위로 임금에게 진달(陳達)하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무상(無狀)함이 심하다 하겠다.】
【사신은 논한다. 윤인서는 아첨하고 사특하며 음흉하고 간사하여 교활한 짓이 무상한 사람으로, 연줄을 대어 대궐 안에 빌붙고 번갈아 권세 있는 간신을 섬기며 주구 노릇을 하여 진신(搢紳)들에게 해독을 끼치고 조정에 화를 만드니 사람들이 모두 통분하게 여겼다.】
【원전】 20 집 252 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풍속-예속(禮俗) / *역사-사학(史學)
《 선조 022 21/06#01(임오) / 광주 사는 노사영 등이 판관의 혁파를 청하니 대신에게 의논하다 》
광주(光州) 사람 노사영(盧士英) 등이 소를 올려 판관(判官)을 혁파하기를 청하는데, 이조가 연혁(沿革)은 중대한 일이라 하여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좌상(左相) 정유길(鄭惟吉)이 의논드리기를,
"광주는 지역이 작고 공무가 간소하여 한 목사(牧使)로도 충분히 다스릴 수 있으며, 노사영 등은 그 지방에 거주하면서 민폐를 익히 생각하여 본 터이므로 이같은 소청(疏請)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호남(湖南)은 풍속이 다른 곳과 달라서 관리를 혁파하는 일이 주민의 소(疏)에 의해 한번 이루어진다면, 앞으로 구제하기 어려운 폐단이 생길까 염려됩니다. 왕화(王化)를 승선(承宣)하는 일은 방백(方伯)의 임무로 조정도 방백에게 의중(倚重)하고 있는 바이니, 그곳 감사에게 물어서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감사에게 물어 처리하라고 전교하였다.
【원전】 21 집 451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영조 036 09/10/18(병인) / 참위에 현혹되지 말도록 하교하다 》
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참위(讖緯)의 말을 나는 매우 그르게 여기는데, 지금 조선(祖先)의 보감(寶鑑)을 강하다 보니, 척연(쾩然)함을 깨닫게 된다. 일찍이 듣건대, 호남(湖南)의 풍속(風俗)이 가장 잡술(雜術)을 숭상한다고 하는데, 지난해 송하(宋河)의 요술(妖術)과 근래에 태진(太眞)의 참서(讖書)에서 그 폐해(弊害)를 볼 수 있다. 더욱이 감여(堪輿)의 말도 또한 허황됨이 많은 것이다. 금년처럼 잇따라 흉년이 들어서 인심(人心)이 안정되지 못한 때에는 진실로 정도(正道)를 깨달아 알게 함만 못하니, 엄중하게 참위(讖緯)를 금해야 할 것이다. 그대 도신(道臣)들은 열읍(列邑)으로 하여금 소민(小民)에게 효유(曉諭)하게 하고, 그 나머지 참위와 음양(陰陽)의 책들은 서운관(書雲觀)에서 반행(頒行)한 것이 아니면, 드러나는 대로 불에 던져서 백성들로 하여금 사경(邪徑)을 버리고 정도(正道)로 나아가도록 호남 도신에게 하유(下諭)하라."
【원전】 42 집 385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영조 071 26/01/16(경신) / 승지 남태온이 호남의 사정에 대해 아뢰다. 》
승지 남태온(南泰溫)이 입시하여 아뢰기를, "신이 새로 호남에서 왔습니다. 호남의 인심이 매우 교활하나 부세(賦稅)를 탕감해 준 뒤로는 백성들이 모두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이 나라의 명령에 잘 따르던가?" 하니, 남태온이 말하기를,
"백성들도 나라에서 뜻한 바를 알기 때문에 영을 내리지 않아도 스스로 행하고 위압하지 않아도 엄하게 여깁니다. 이번의 우금(牛禁)으로 말하더라도 백성들이 금령(禁令)을 어기지 않아 죽지 않은 소가 거의 4, 5천 두는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에 인구의 증가는 성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근래에 가장 성합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지난번 권학(勸學)을 하유하셨는데 매우 장려하는 효과가 없지 않았으니, 또한 8도에 반시(頒示)하여 똑같이 면려하는 방도로 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남도 풍속이 교사스러워 한번의 정사나 명령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남태온이 영을 내리지 않아도 스스로 행하고 위압하지 않아도 엄하게 여긴다고 말하였으니, 무슨 말을 그리도 쉽게 한단 말인가? 면대하여 속임에 가깝다고 하겠다. 임금이 인구의 번성에 대하여 물으면 의당 기근과 역질로 살아남은 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아뢰어 임금의 마음을 경성(警省)케 하여야 하건만, 이제 그 반대로 말을 했으니 무슨 마음에서인가?"】
【원전】 43 집 360 면
【분류】 *행정(行政) / *사법(司法) / *농업(農業) / *보건(保健) / *역사(歷史)
《 정조 051 23/06/26(계축) / 전 전라도 관찰사가 호남의 사치 풍속과 모내기에 대해 아뢰다 》
전 전라도 관찰사 이득신(李得臣)이 아뢰기를,
"호남의 습속은 다투어 사치를 숭상하여 그릇이나 옷을 남보다 낫게 하려고 힘쓰고 있는데, 관혼 상제인 경우에는 더욱 한도가 없습니다. 이렇게 점점 물들어가고 있으니 폐해가 갈수록 많아집니다. 신이 본도에 재임할 당시에 엄하게 금지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습속이 이루어진 지가 오래되어 변화시켜 고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영읍(營邑)에 관문을 보내 신칙하여, 무릇 복식과 혼례와 상례에는 차라리 검소하게 할지언정 사치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더욱 깨우쳐 주게 하고, 이러한 내용을 규정으로 만들어서 실제적인 효과가 있게 하소서."
하였는데, 따랐다. 또 아뢰기를,
"호남의 올해의 가뭄은 지난해와 다름이 없었는데도 모내기를 갑절이나 많이 한 것은 모두가 지난번에 제방에 대하여 신칙을 한 결과입니다. 대개 지방의 토호들과 간사한 백성 가운데에는 금법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제방 안에서 함부로 경작을 하는 자가 많습니다. 그 폐단을 따져보면 이익은 하나이고 폐해는 백입니다. 그 가운데에 이미 경작지를 측량하여 장부에 올려 조세를 납부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거론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새로 개간한 것과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긴 것에 대해서는 즉시 도로 물려서 예전대로 복구하고 하나 하나 물길을 뚫으라는 뜻으로 묘당으로 하여금 관문을 띄워 엄하게 신칙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