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300만명 떼죽음, 김일성우상화 때문"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古平面) 남리(南里)에서 태어나 82세의 나이로 1994년 7월 8일 사망했다.
4월 15일은 북한의 최대 명절인 김일성의 생일이다. 북한식으로는 '96주년'이다. 김일성은 사망한 지 14년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북한에서는 '살아있는' 셈이다.
김일성 사망 후 11개월이 지난 1995년 6월 김정일은 김일성의 집무실이었던 금수산의사당을 '금수산기념궁전'으로 개축하여 시신을 영구보존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김일성의 시신보존작업은 사체보존작업에 최고의 기술을 보유한 러시아 '생물구조연구센터'가 담당했는데, 이 연구소는 레닌의 사체 또한 영구보존작업을 맡았던 곳이다.
舊소련의 레닌(1924), 불가리아의 디미트로프(1949), 舊소련의 스탈린(1953), 舊체코슬로바키아 고트발트(1953), 베트남의 호치민(1969), 앙골라의 네트(1979), 가이아나의 바남(1985), 중국의 마오쩌둥(1976)에 이어 사회주의 지도자 중 김일성의 시신은 9번째로 영구 보존됐다.
알려진 김일성의 사체보존 방법은 ▲사체를 발삼향의 액체가 담긴 수조에 넣고, 그 향액을 삼투압을 이용하여 피부로 삼투시키는 작업을 진행하고 ▲뇌와 안구, 내장 등은 빼내고 젤 상태의 발삼액을 사체 내에 채워 넣은 다음 ▲생체의 수분량과 같은 약 80%의 발삼향액을 사체에 넣고, 피부가 건조되도록 몇 시간 공기에 노출시키고 ▲발삼향액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노출부분을 미라처럼 가죽 포대로 감는 작업을 하고 ▲얼굴에 화장을 하고, 새 옷을 입히면 보존처리가 완성된다.
사후 보존에도 매우 신경을 써야하는데 주 2회 관(棺)에서 꺼내 방부제를 얼굴과 손 등의 노출부위에 발라야주어야 하며 2~3년에 한번은 발삼향액 수조에 한 달 가량 담궈두어야 시신을 보존할 수 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시체 보존에 들어가는 비용 또 한 막대한 액수다. 1995년 7월 7일 러시아의 모스크바 뉴스는 "러시아인 기술자 7인에 의하여 (김일성의)사체보존작업이 완료됐다"며 "100만 달러가 소요되었지만 이후에도 막대한 비용이 든다"고 보도했다.
또한 1996년 7월 북한을 방문한 인도네시아 골카당 대표단은 조선노동당 간부로부터 "김일성의 사체관리를 위해 연간 80만 달러가 든다"는 설명을 듣기도 했다.
북한은 김일성의 시신을 일반 주민들에게 공개하고 있는데 1996년 7월 27일 조국해방전쟁 승리 43주년 기념일 이후부터는 외국인 관광객도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곳에는 어떤 소지품도 갖고 들어갈 수 없다. X레이 검색대를 통과한 후 신발 바닥의 먼지를 자동카페트 위에서 털어내고, 다시 축축한 카페트에 올라 신발에 붙어있는 박테리아를 제거한 후에야 입장이 가능하다. 관이 놓여 있는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공상과학영화에 나오는 기계처럼 생긴 흡입여과기에 들어가서 옷에 붙은 병균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
전 조선노동당 비서였던 황장엽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은 "북한이 금수산기념궁전 성역화에 엄청난 돈을 들이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굶어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며 "이 기간에 북한에는 유래 없는 홍수와 가뭄이 몰아닥쳤고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갔다"고 밝힌 바 있다.
한편, 북한은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부터 1997년 3주기를 맞을 때 까지 3년 동안 4.15 생일축하 비용으로 약 6천9백만 달러라는 거금을 지출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이 자랑하는 금수산기념궁전은 수백만 명의 목숨을 빼앗으며 건설되었다. 다행히 주석부 근처에서 자란 나는 기념궁전의 변천사를 잘 알고 있다.
예전에는 금수산기념궁정을 주석부로 불렀는데 김일성이 사망하고 나서 김일성이 집무를 보던 이곳을 다시 새롭게 정비하고 개건 확장하여 지금의 금수산기념궁전으로 확장 건설하였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후 1995년 금수산기념궁전 건설에 수많은 북한주민들이 동원되었다. 여기에는 인민군들과 만수대창작사 일군들이 대거 참여 했다.
원래 녹음이 우거진 곳이지만 더욱 아름답게 꾸리기 위해 포도밭도 만들고 주석부 주변의 2~3km 주위에 나무를 새로 심고 가꾸게 했다. 또한 주석부와 용성구역 사이에 직선으로 통하는 새 도로를 건설하였다. 이 도로를 건설하면서 수많은 군인들이 죽었다.
주석부와 용성을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하려면 200m 정도 되는 터널공사를 해야 한다. 이 터널 공사를 하면서 한 개 소대(30~40명)가 폭파사고로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사건은 쉬쉬하고 훈장수여로 마무리했다. 북한은 군인들이 건설장에 동원됐다가 죽었을 때 대치하는 것이 바로 아무 쓸모도 없는 훈장 수여식 놀음이다. 그래서 그 훈장을 "바가지 훈장"이라고 한다. 바가지로 훈장을 퍼 준 다해서 바가지 훈장이라고 한다.
주석부 안과 밖은 그야말로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김정일은 직접 건설을 지휘하면서 시신영구보존은 물론 대리석 하나하나에도 결제를 내렸다. 김일성은 살아생전에 자신이 죽고 나면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의 유언을 거부하고 주석부 전체를 시신궁전으로 꾸리고 금수산기념궁전으로 개칭하였다. 교활한 이기적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으로 모신다면서 그 아버지 수령의 그늘 밑에서 군사독재정권을 이어가려는 흉계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금수산기념궁전에 들어서는 돌문은 김일성의 대원수견장이 새겨진 수백 톤에 달하는 작품이 있다. 기념궁전 울타리도 70만개의 화강석에 길조의 상징인 백조를 새기도록 하였다. 이렇게 외부건설에 수많은 외화를 들였으니 시신 보존에 들인 돈은 실로 막대하다.
300만 인민들이 굶어죽는 속에서 8억 9천만 달러의 큰돈을 들여가며 김일성의 시신을 안치할 금수산기념궁전을 건설했다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그 금수산기년 궁전건설에 동원되었던 주민들과 군인들도 많이 죽었지만, 300만 인민들의 주검으로 세워진 것이 바로 지금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이다.
평양시안의 주민들도 이처럼 막대한 돈을 들여가면서 기념궁전을 꾸린 것을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일체 공사비용을 극비로 하고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나 화려하고 현대식으로 잘 꾸렸는지 학생들이 하는 말, "우리 집 보다도 그곳의 화장실이 더 멋있다"고 한다. 단지 내부는 보관유지상 공개하지 않는 이유로 외부만 들러보고 하는 소리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에서 일반인들에게 금수산 기념궁전방문을 허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고위일군들이나 추천된 핵심당원들만 내부 방문이 허용되고 있으며 시신이 안치된 방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평양시안의 일반 주민들은 대부분 내부 방문을 하지 못한다.
죽어서도 신비의 인물로 영원하고 싶은 독재자들의 야망을 아버지 김일성의 시신을 통하여 영위해 보려는 독재자의 꿈이 깃든 곳이 바로 금수산기념궁전이다.
이것이 개인이기주의자 김정일의 본성이다.
- 차정심 前 노동당 간부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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