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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한민족의 문자 역사

가.녹도문자(사슴발자국 문자)
1>.5900년전 배달국(밝다) 1대환웅인 거발한환웅의 신하인 신지벼슬의 혁덕이 사냥갔다가 모래밭에 찍힌 사슴발자국을 보고 글을 만들었는데 이를 녹도문자라고 부르며 녹도문자는
81자의 천부경으로 기록되어 내려오고 있고 액운을 물리치는 부적의 문자로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2>.신라 고운 최치원이 금강산 석벽에 새겨진 녹도문자를 해독하였고 가로 9자 세로 9자합하여 81자의 천부경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한문
한문을 흔히 중국의 문자로 알고 있으나 이는 우리 동이족의 문자입니다.
배달국 14대환웅 치우천황(자오지환웅)의 신하인 군장 창힐이 까마귀발자국을 보고 만든글이 최초의 한문이며 창힐은 동이족으로서 우리민족입니다.


다.한글 (가림토문자.혹은 가림다문자)
1>.한글은 500년전 후조선의 세종왕이 창제한것이 아니라 4300년전 쥬신국 3대 단군(환검)인 가륵단군이 9환국 3한(250여 부족국가)의 여러부족국가의
말이 잘 통하지 않으므로 신하인 삼랑 벼슬의 을보륵에게 명하여 글을 만들게 명했습니다.

2>.을보륵은 환국의 천부인사상을 응용하여 "천부인"으로 글을 만들었는데
" 천"은 하늘상징인 "ㅇ"에서 ㅇ.ㅎ등이.....
"부"는 땅의 상징인 "ㅁ"에서 ㄱ.ㄴ. ㄷ.ㄹ.ㅁ.ㅂ.ㅌ.ㅍ.ㅋ등이.....
"인"은 사람상징인 "ㅅ"에서 ㅅ.ㅈ.ㅊ등이.....
모두 38자의 정음인 글을 만들었는데 이를 "가림토문자" 혹은 "가림다문자"라 부릅니다.

3>.한글의 원형인 가림토문자는 2050년전 인도의 "구자라트"지방으로 건너가 "구자라트문자"가 되었으며, 1250년전 일본 남부의 신대지방으로 건너가서 신대문자가 된것이며 일본 신대지방의 700년전의 각종유물에 한글원형인 가림토문자가 유물로서 전해내려오고 있고 일본은 고구려문자인 지금의 일본어와 더불어 한글원형인 신대문자를 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4>.500년전 후조선국의 세종왕이 고대 쥬신국의 가림토문자가 우리의 글자임을 알고서 집현전학자인 신숙주와 성삼문을 시켜 중국에 13번 답사케하여 전해오는 쥬신국의 비문을
탁본하여 가지고 오게했고 세종왕은 38자의 "가림토문자(가림다문자)"중에 10자를 삭제하고 28자만을 골라 훈민정음이라고 발표한것이 한글창제의 진실이며 조선왕조실록에도 짤막하게 한글은 고대 쥬신국의 글을 따온것이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5>.후조선국은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세조부터 3대왕에 이르기까지 한글창제의 진실을 은폐하고 세종왕의 업적으로 만들기위해 "고조선비사"."대변설". "조대기"."지공기"."표훈천사"."삼성밀기"."도징기"."통천록"등의 상고사를 읽지못하도록 상고사를 수거하여 불사르고 이를 어기면 역모의 죄로 다스렸는데 이를 후조선의 금서라고 부릅니다.


가.최만리의 상소문: 세종때 부제학 벼슬을 지낸 학자
崔萬理等 諺文創制 反對上 (世宗實錄 券一百三 十九張)
(최만리등 언문창제 반대상소문 (세종실록 권일백삼 십구장))

1.세종 26년 2월20일에 최만리를 중심으로 한 집현전의 일부학자들이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하기 위하여 세종에게 올린 상소문의 서두에 해당하는 대목으로서
신등(
臣等)이 엎드려 언문의 제작을 살피옵건데, 지극히 신묘(神妙)하와 창물운지(創物運智)가 멀리 천고에 뛰어나나, 신등의 구구(區區)한 관견(管見)으로는 오히려 의심스러운 바가 있사옴으로,
감히 위간(
危懇)을 베풀고 삼가 뒤에 조목(條目)을 드는 바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는 바, 거룩한 재결(裁決)을 바라는 바입니다.

2.감히 말하기를 "언문은 본디 다 옛글자요, 새로운 글자가 아니다"라고 하는데 글자의 형태는 비록 옛 전문을 모방하였다지만,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이 모두 옛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바가 없습니다.
(세종실록 권 103 26년(1444)2월
庚子) <諺文皆 本古字 非新字也>

3.이 반대 상소에 가담한 대표적인 학자는 최만리,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이며 당시 집현전을 대표하던 쟁쟁한 학자들로 당대의 학풍을 주름잡던 학자들이다.
이처럼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사람들도 집현전 학자요, 반대한 사람들도 집현전학자들로서 최만리등을 포함한 집현전학자들의 주장은 세종대왕이 만들었다는 한글의 자모는
모두 다 옛날부터 있었던 것인데, 세종대왕이 모방하면서 "글자를 변경시켰다"는 충격적인 내용이다. 최만리등을 포함한 집현전학자들은 이와같은 상소문 때문에 옥에 갇혔다

4.더욱이 <세종실록> 25년 조에는 최만리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내용이 또 있는데 한글 28자는 옛 "전자(
篆字)"를 본받았다는 기록이었다.

5.한글의 탄생과 관련이 있는 또 하나의 문헌은 조선 성종 때 성현이 지은<용재총화>의 한 구절이었다.
즉, 한글의 자모를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에서 빌려왔다는 내용이었다.


6.훈민정음해례본
ㄱ).현존본은 1940년경 경북 안동 어느 고가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세종 28년(1446)에 정인지 등이 세종의 명을 받아 설명한 한문해설서를 전권 33장 1책으로 발간하였는데 책의 이름을 훈민정음이라고 하였다.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ㄴ).이 책은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최항, 박팽년,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 집현전의 8학자가 집필한 것으로 훈민정음의 내용을 살펴보면 두 부분으로 되었는데
제 1부는 세종이 지은 것으로 책의 본문에 해당된다.
제 2부는 세종의 명령에 따라 젊은 학자들이 지은 본문에 대한 주석이다
정인지의 서문이 1446년 음력 9월 상순에 쓰여졌다고 되어 있어 늦어도 음력 9월 10일에 출판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에서 이 책의 출판일을 기념하여 한글날로 제정하였고.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나.인도의 구자라트문자
1).인도의 서북부 수라스트란 반도에 위치한 구자랏주 바도다라시를 살펴보면 시가지의 간판은 모두 한글이며 70%이상이 현재의 한글과 똑같다
인도에선 이를 산스크리트문자 또는 구자라트문자라고 부르며2500년전 아쇼카대왕이전부터 있던글자이며 훗날 아쇼카대왕때 가장많이 쓰였던글자로 기록하고 있다

2). 2500년전에 한글 가림토문자가 전파된후 본격적으로 2050년경부터 사용한것으로 확인)
산스크리트문자 또는 구자라트문자는 글자꼴과 음운까지도 한글과 똑같다


다.서불문자:경상남도 기념물 제6호
지정일자 : 1974.02.16
위치 : 상주면 양아마을
규모 : 가로 7m, 세로 4m, 자연암 위에 음각

1.경남(
慶南) 남해군(南海郡) 상주면(尙州面) 상주리(尙州里) 즉, 남해도(南海島) 상주해수욕장(尙州海水浴場)이 내려다 보이는 금산(錦山, 701m) 기슭에는 옛부터 전해지는 고문자(古文字) 금석문(金石文)이 있다.
이 암각(
岩刻)에 대한 기록(記錄)은
"남해현(
南海縣) 낭하리(郎河里)의 암벽(岩壁)에 신시고각(神市古刻)이 있다."
"남해현(
南海縣) 낭하리(郎河里) 계곡에 있는 바위 위에 신시고각(神市古刻)이 있는데, 그 글은 환웅(桓雄)이 사냥을 나가서 삼신(三神)에게 제사(祭祀)를 지냈다는 내용이다."

2."최치원(
崔致遠)이 일찍이 신지(神誌)가 새겨진 옛비석을 찾아 . . .
즉 낭하리(
郎河里)의 암각(岩刻)이 그것(神誌)의 실제 흔적(痕迹)인 것이다."등으로, 과거부터 여러 문헌(文獻)에서 보이고 있다.

3.특히 조선시대(
朝鮮時代)의 이맥(李陌)이 1520년경에 편찬(編纂)한 태백일사(太白逸史)에 의하면, "소문을 듣건데, 남해도(南海島) 낭하리(郎河里)의 계곡과 경박호(鏡珀湖) 선춘령(先春嶺)과 오소리(烏蘇里) 바깥의 돌 사이에서 언젠가 조각(彫刻)을 발견하였는데,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쉽사리 해독(解讀)하지 못한다.
추사 김정희가 이 글씨의 뜻을 알 길이 없어 중국의 유명한 학자에게 탁본을 보냈는데 글자의 형태는 진나라 소전 이전의 글씨처럼 보이나 도무지 그 뜻을 알길이 없다.

4.조선(
朝鮮)시대의 모든 비석(碑石)의 글을 종합(綜合)하여 놓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攬, 朝鮮總督府 發刊)에도 이 암각(岩刻)은 고문자(古文字)의
하나로 기록(
記錄)되고 있으며, 조선시대부터 '서시과차(徐市過此)'라는 뜻을 지닌 고대문자(古代文字)로 생각하였다.

5.19세기 학자(
學者) 오경석은 이것을 초기(初期) 한자(漢字)인 상형문자(象形文字)로 보아 '서시기배(徐市起拜)' 즉 서시(徐市)가 일어나서 솟아 오르는 태양(太陽)에 예()를 드렸다는 말을 새긴 것으로 보았고, 그 후 정인보는 그의 저서(著書)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에서 이 암각(岩刻)을 '임금() 혹은 장상대인(長上大人)이 수렵(狩獵)을 나와서 산짐승과 날짐승을 잡으며 건너와 이곳에 기()를 꽂았다'는 내용의 고문(古文)으로 해석하였다.

6. 여기 남해도(
南海島)에 있는 암각(岩刻)은 형태(形態)가 섞여져 있으며, 그렇지만 각각의 형태들이 모두 균일(均一)한 선()으로 이루어져 적당한 짜임새를 보여주고 있기에, 최소한 상형(象形)의 전문(篆文)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발견되는 대마문자(
對馬文字)나 도목문자(桃木文字)와 같은 계열(系列)의 전문(篆文)이면서, 암각의 위치와 상태로 보아, 기도(祈禱)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부적(符籍)과 비슷한 성격(性格)으로 새겨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7.여하튼 이 암각(
岩刻)은 아직까지 어떠한 의미로 된 내용(內容)인지 분명하게 해독(解讀)되지 않는 상황이며, 왼쪽 아래에 보이는 '천()' 자()는 후대(後代)에 새긴 것으로 생각된다. 과거에는 이와 비슷한 암각(岩刻)이 산 건너편에도 있었다고 전해지며 이와 비슷한 암각(岩刻)이 남해도(南海島)의 서리곶, 거제도(巨濟島)의 갈곶절벽, 제주도(濟州道)의 정방폭포 밑에도 있다고 전해지며 남해도(南海島) 곳곳에 산재(散在)되어 있는 바위의 거북등 모양들은 태양(太陽)의 상징(象徵)을 새긴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라.기록(記錄)으로 알 수 있는 고대(古代) 글자
1.신시(
神市)시대에는 산목(算木) 또는 신지(神誌) 혁덕(赫德)이 만든 녹서(鹿書), 자부(紫府)의 우서(雨書), 치우(蚩尤)의 화서(花書) 또는 투전목(鬪佃目) 등이 상고시대(上古時代) 신지(神誌)들의 업적(業績)이었으며, 복희(伏羲)의 용서(龍書)와 단군(檀君)시대에 삼랑을(三郞乙) 보륵(普勒)이 만든 가림토(加臨土 또는 加臨多)의 신전(神篆)들이 백산(白山), 흑수(黑水), 청구(靑邱), 구려(九黎)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부여(夫餘)에서는 서산(書算)이나 부여인(夫餘人 또는 漢水人이라고도 함) 왕문(王文)이 전문(篆文)을 축약(縮約)한 부예(符隸 또는 吏讀文)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2.발해(
渤海)에서는 현재 러시아어(russian)와 비슷하게 타지역(他地域) 글자를 뒤집어 사용하는 독특(獨特)한 반자(反字)를 고집(固執)하였다.
그리고 왜(
)와 진() 그리고 나머지 국가들은 횡서(橫書), 결승(結繩), 계목('+')을 혼용(混用)하였으며, 고려(高麗高句麗)는 영법(潁法)을 모사(模寫)하였다고 한다.
진(
, chhin, B.C. 221~B.C. 207)나라 때의 정막(程邈)은 숙신(肅愼)에게 사신(使臣)으로 가서 얻은 왕문(王文)의 예법(隸法)과 한수(漢水)에 가서 얻은 것을 약간 고쳐 팔분(八分, 八分體)을 만들었다.
그리고 진(
, chin, A.D. 265~420)나라 때의 왕문(王文)의 후손(後孫)인 왕차중(王次仲)은 해서(楷書)를 만들었다.

3.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진(
)나라 이후에 만들어진 지금의 한자(漢字, chinese)가 원래 동이족(東夷族)이 사용한 글자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한글(korean)을 비롯한 일본어(japanese) 또한 이렇게 과거부터 계승(
繼承)된 언어(言語)를 각자 개발(開發)시킨 것이다
열거(
列擧)한 글자들 가운데, 사슴 발자국을 보고 만들었다는 녹서(鹿書)는 현재까지 알려진 고대문자(古代文字) 가운데 마야(maya)의 상형문자(象形文字)와 매우 비슷하여 이 녹서(鹿書)의(녹도문자) 흔적(痕迹)이 아닐까 생각된다.

4.마야에서도 상형문자를 읽어 나갈 때, 한자(
漢字)와 마찬가지로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읽어 나가며, 숫자를 계산하는 방법도 초기(初期) 마야에서는 작대기(_)와 점(.)으로 이루어진 상형문자(象形文字)로 가림토정음(加臨土正音)에서 보이는 형태와 마찬가지이다. 또한 숫자를 계산할 때, 작대기를 하나씩 쌓아 올리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비록 후기에는 그림이 보다 화려해지고 작대기와 점이 옆으로 세워지지만, 그 원래의 기본적인 방법에는 변함이 없다.

5.그리고 우서(
雨書)는 작대기만으로 이루어진 'ㄱ'자형(字形)으로 여겨지는데, 태백일사(太白逸史)에 소개된 유기(留記)에서는 이 자형(字形)을 태백산(太白山)의 푸른 바위 절벽(絶壁)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화서(
花書) 또는 투전목(鬪佃目)은 지금의 초서(草書)와 비슷한 형태로 종이로 만든 쪽의 일종이라고 하며, 용서(龍書)는 복희(伏羲)의 64괘()에서 볼 수 있는 역문자(易文字)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여기서도 효()를 구성할 때, 아래에서부터 쌓아올린다.
그리고 가림토(
加臨土) 신전(神篆)은 지금까지의 여러 글자의 모양과 방법을 추려서 만들었으며, 한글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6.왕문(
王文)이 만든 부예(符隸)는 이두문(吏讀文)으로서, 진() 나라에서부터 정립(定立)되기 시작한 지금의 한자(漢字)에 상당한 역할(役割)을 하였으리라 짐작된다.
한편 일본열도(
日本列島)에서 발견된 20여가지의 고대문자(古代文字)들이 이와 비슷하거나 해당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중 대마문자(對馬文字)와 도목문자(桃木文字)는 여기 남해도(南海島)에서 발견된 모양과 상당히 유사(類似)하다. 주로 나뭇가지나 뿌리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해안(南海岸) 일대의 해양족(海洋族)이 사용하였던 글자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