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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조선왕조 500년 금서(禁書)

범세동(范世東)의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는 오백 년 금서였다

원천석(
元天錫)과 함께 화해사전(華海師全)을 편집하고, 동방연원록(東方淵源錄)을 편찬하였던 범세동(范世東 생몰년 미상)은 북부여기(北扶餘記)를 저술, 우리의 상고를 밝혔다.
그가 쓴 화동인물총기(
話東人物叢記) 또한 조선 500여 년 동안 금서(禁書)로 금성 范氏 문중에서 목숨을 걸고 지켜진 사실이다.

범세동은 "들키면 멸족 당하니, 비장(
秘藏)의 풍토가 생겼다 (같은 책 28면)"라 하여 정치 탄압이 심할 때는 자고로 비기(秘記)로 하여 비장(秘藏)하였다"고 기록을 남긴 것을 보면,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살벌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언제인가 사기(
史記)될 것을 바란다

이어 '포은(
圃隱)과 목은(牧隱)의 대도론(大道論)을 운곡(耘谷)이 나에게 주었다가 누설되면 화가 두 집의 자손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 하여 야사(野史)로 하여 세상에 내놓지 아니하고 간직하게 되었다.(같은 책 134면)'고 썼다.
또한 '정사(
正邪)를 가리려는 오등의 야필(野筆)이 언제인가는 시원하게 서술되고 사기(史記)될 것을 바란다'고 소회를 밝혔다.

화동인물총기는 또 고려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최충(
崔沖 984-1068)이 구제학당(九齋學堂)을 세워 문교(文敎)의 진흥과 사학(私學)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그의 문집이 무신 정권 때 정중부(
鄭仲夫 1106-1179)에 의해 남김없이 불살라졌다고 기록했다.

1362년 7월 편조가
山林岩穴 궁벽한 골짝까지 비장된 문서를 몰수, 분서로 전해지지 않는다고 했으며 申賢의 문적 기록들이 李存吾鄭樞家誌가 적발될 때 같이 불태워 졌다(같은 책 157, 263면)'고 썼다.
鄭道傳, 諸家華海全, 秘誌를 거두어 불살라

한편 정도전(
鄭道傳)은 諸家華海全, 秘誌를 거두어 불살랐는데 癸酉 겨울 깊은 산속까지 뒤져 감추어진 것을 하나하나 몰수하여 태웠다고 했다.
또 진자성(
陳子誠)의 무리가 의 기록을 뒤적여 모두 다 불질렀다 (같은 책 265면)고 밝혔다.

고려 말, 선초의 혼란기를 틈탄 분서사건들은 대체적으로 정적 간의 싸움에서 비롯되어 한 시대의 역사를 단절시키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북부여기(
北扶餘記) 저술, 두문동 72현 범세동(范世東)은 고려 말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금성, 자는 여명(
汝明), 호는 복애(伏崖)이다.
통찬(
通贊) 후춘(後春)의 아들이며 정몽주의 제자이다.

일찌기 공민왕 18년인 1369년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두문동(
杜門洞) 72현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덕녕부윤(
德寧府尹)에 이어 낭사()의 책임자인 간의대부(諫義大夫)를 역임하였으며, 사후에 후덕군(厚德君)에 봉해지고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았으며 개성의 표절사(表節祠),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 광주의 복룡사(伏龍祠)에 제향되었다.

광주직할시 광산구 덕림동에 묘소가 있으며, 북구 생룡동에 사우(
祠宇, 龍湖齊)가 있다.

-'
古代史書는 불타고 있는가' 집필내용 중에서.

(이 사서 기록을 위해
話東人物叢記 절판본을 기커히 제공해 주신 전남대학교 출판부 박병배 과장님, 문중 족보, 자료 제공 및 伏崖 선생님의 묘소, 사당 전경 사진 게재를 허락해 주신 范大錞 박사님께 고마운 말씀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