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은 共産主義(공산주의) 활동가였다" …일본 월간지
다시 한번 김대중의 정체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 12년전 일본 월간지, 『政界(정계)』(Siekai), 1996년 2월호(pp.114-118)에 山崎 一(야마자키 하지메)이 쓴 김대중관련 기사, <김대중은 공산주의 활동가였다> 전문을 싣기로 했다. 이 기사는 김대중의 과거 좌익 행적과 한국전쟁 직후 총살형 위기에 처한 김대중의 목숨을 살려준 그의 절친한 친구 金鎭夏(김진하)씨의 생생한 증언이 담겨있다. 이 기사가 한국 주요 언론에서 대서특필되지 않은 이유가 밝혀져야한다. 왜, 어떤 이유로 97년 대선때 한국 언론은 김대중의 좌익행적과 사상검증을 회피했나? 이제는 사회적 공기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한국 언론이 양심고백을 해야할 때가 되었다.--<이주천>
[이주천 칼럼] 김대중의 허와 실- 파헤쳐진 "봉인된 과거" …일본 월간지 政界 번역물
김대중은 공산주의 활동가였다
Written by 山崎 一(야마자키 하지메)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이은 체포로 한국정계는 풍운을 고하고 있다. 김영삼 현 대통령은 바야흐로 가장 중요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사람의 金" 김대중씨는 스스로 92年의 대통령 선거에서 前 대통령으로부터 비밀자금의 제공을 받았다고 시인하고 「김대통령도 선거자금을 명백히 밝히라」고 金泳三(김영삼)씨와 대결자세를 분명히 했다. 이런 와중에 김대중씨의 "숨겨진 經歷(경력)"을 폭로하는 충격적인 뉴스가 미국으로부터 날아왔다.
◆ 총살직전 金鎭夏(김진하)와의 운명적인 만남
한국의 민주화 투쟁가로서 알려지고 또 야당의 지도자로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던 김대중씨는 1992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金泳三씨에게 패한 후 정계 은퇴를 표명하고 많은 한국민으로부터 그 용기를 칭찬받고 국민의 박수속에 일단은 정계에서 사라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김대중씨는 2년이 채 안되어서 국민과의 약속을 내팽개 치고 95년 여름 당돌하게 정계에 되돌아와 「(새정치 국민회의)」라는 신당을 결성하고 스스로 총재에 취임함으로써 이번에는 국민들로부터 반감을 사고 그 행위는 경멸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대중씨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부정축재 했다고 일컬어지고 있는 6억5천만 달러 中에서 250만 달라를 받은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신당결성 후 정치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
김대중씨가 정계 은퇴를 번복하고, 국민을 우롱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국민들 사이에서는 비판세력이 급증하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 김대중씨에게 정치적 치명상이 될 새로운 사실이 폭로되었다.
김대중씨는 50년의 한국전쟁시에 공산당원이었던 사실과 당시 체포되어 미해군함정에서 총살 직전 미군정보부에 있던 김대중씨와 동향의 친구의 助言(조언)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사실이 46년 만에 미국에서 알려진 것이다.
한국전쟁은 50년 6월 25일(일요일) 아침 5시 북조선 인민군이 38도선을 돌파하여 한국을 기습 침공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동 인민군은 침공 삼일만에 수도 서울을 함락하였다. 한국군은 주말휴가중이어서 교전체제에 들어가는데 시간이 걸렸고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진격하는 인민군에 밀려 후퇴하면서 체제를 정비하였다. 후퇴하는 중에 경찰과 국군은 후퇴지역에 있던 공산당원과 親共(친공) 또는 동조세력이 동 지역에 남아 인민군과 합류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공산당원들을 체포, 살해하였던 바, 그 수는 각지역을 하여 십수만명에 이른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서울에서의 전투가 치열함에 따라, 한국정부와 미군은 서울을 버리고 대전지방 이남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6月 27日 전라남도 목포에 주둔하고 있던 미해군에게도 부산으로의 후퇴명령이 내려졌다.
목포를 본부로 하여 近隣海域(근린해역)에 주둔하고 있던 미해군과 해병대는 부산으로 후퇴를 준비하던 중 본부의 지시에 따라 경찰이 체포한 목포지역의 공산단 세력 약 450명을 해군함정에 태우고 있었다. 함정에 실린 공산당원과 그 지지자들은 부산으로 가는 도중 남해안의 해상에서 총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위 체포자 속에 김대중씨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이 총살형직전의 김대중씨를 발견하여 목숨을 살린 사람은 김대중씨의 보통학교 때부터 고향의 학우로 舊制(구제) 5年 과정의 상업학교까지 함께 공부하고 형제와 같이 지내던 김진하라는 인물이었다. 이때 김대중씨는 김진하씨를 만나지 못하였다면 바다의 풀덩쿨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비밀이 한국동란 후 46년간이나 알려지지 않다가 지금에 와서 튀어나온 것은 건강을 해친 김진하씨가 교회의 친한 목사에게 신앙고백을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김진하씨가 그 숨겨왔던 가슴속을 털어놓은 것은 미국 와싱턴 D.C에서 한국어로 발행되고 있는 주간지 「Washington Today」의 95년 8월 24일자 일면에 크게 보도되었다.
지금까지도 김대중씨의 정적은 김대중씨가 청년시절에 공산당 활동가였다고 공격은 해오지만 戰中戰後(전중전후)의 혼란기의 기록이 없기 때문에 확실한 증거를 지적할 수 없어 소문의 영역에 머물렀다.
한편, 김대중씨는 이것을 中傷(중상)이라고 부인하고 「전쟁때 북조선 인민군에 체포되어 죽을 뻔했다고」 주장하고 역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메카시즘 수법이라고 반격해왔다.
하지만 김대중씨는 철저한 공산주의자였고 총살 직전에 기적적으로 생명을 이어냈다는 새로운 사실이 명백해지고, 현장에서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당시의 자세한 경위를 증언한 것이다.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이 증언 사실을 한국민이 알게 될 때, 어떠한 반응을 할 것인가 큰 관심거리이다.
◆ 지속적으로 국민을 우롱해온 김대중씨
「Washington Today」지는 1페이지 반에 거쳐 "김대중은 행동하는 야심가인가? 행동하는 양심가인가?" 과거의 경력의혹을 꼭 밝혀라" 라는 표제로 K씨의 증언고백 기사를 크게 보도했다. 이 기사는 미국안보(ANSC) 한반도안보연구소의 소장인 金映勳(김영훈) 박사의 서명이 들어간 특별기사이지만 증언자를 K씨라고만 밝히고, 그 K씨는 와싱턴 근교에 사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K씨는 김대중씨가 공산주의활동을 한 까닭에 미해군함정에서 총살형의 위기에 있었음을 발견하고 미군장교에게 자기의 친한 친구임을 보증하여 김대중씨의 목숨을 구하고 있다. K씨는 김대중씨와 동향으로 보통학교와 목포상업학교의 동창이며 당시 K씨는 미군정보기기관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 후 쭉 2,3년 전까지 김대중씨와는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고 한다.
K씨의 생생한 증언에 의하면, 목포에 주둔하고 있던 미해군에 부산으로 후퇴 명령이 내려진 것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이틀 후인 6월 27일 오전이었다. 그 때 공산주의자나 동조자 등 수백명이 경찰에 체포되어 미군함정에 수용되었다. 그 중에 K씨는 김대중을 발견하고 자기가 갖고 있던 메달을 건네면서 "김대중의 이름을 호명하더라도 절대 대답을 하지마라 대답을 하게 되면 총살된다"고 말해주었다.
그 후 미해군 장교가 체포자 명부를 갖고 확인작업에 들어갔으나, 김대중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 장교는 이름이 호명되지 않은 자는 앞으로 나오라고 지시하였으며, 김대중은 K씨로부터 받은 메달을 손에 들고 앞으로 나왔다.
메달에는 미군정보부소속요원을 증명하는 K씨의 이름이 들어있었고, K씨는 그 장교에게 "이 사람은 나의 친구로 정보수집을 위해 메달을 건네주었다. 이 사람은 김대중이 아니다"라고 가짜로 신분보증을 했기 때문에 김대중은 총살을 면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씨는 "내가 젊었을 때는 민족주의 운동에 참가한 일은 있으나 공산주의 운동에는 참가한 일이 없다. 경찰을 돕기 위하여 민간해상경비대를 조직하여 정부에 협력했다."등을 주장하고 있다.
그의 저서에도 이와 같은 것을 기술하고 있다. 김대중씨는 공산주의에 가담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한국전쟁이 발생한 50년 6월 25일에는 사업관계로 서울에 있었는데 결국 피난은 가지 못하고 북조선군이 점령한 서울에 숨어있다가 수일 후 서울을 탈출하여 20일간을 걸어서 400킬로나 되는 목포에 도착했다"고 당시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K씨 증언에 의하여, 김대중씨의 지금까지의 주장은 허위로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다고 보도하고 있다.
◆ 증언자 K씨와 워싱턴에서 만나다.
필자는 「Washington Today」의 보도기사를 확인하고자 급거 워싱턴으로 비행하여 증언자 K씨의 소재를 찾아 나섰다. 첫째 K씨의 증언을 기사화한 김영훈 박사를 만나 증언자 K씨의 소재지를 확인, K씨를 방문할 수가 있었다.
「Washington Today」지에 보도된 기사의 뒷받침이 되는 증언자는 앞서 소개한 김대중씨와는 옛 친우인 김진하씨이다. 그는 70년대 후반에 미국으로 옮겨 美정보기관에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80년대 후반에 퇴직하여 현재는 딴 미국기관에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다.
김진하씨는 수 시간에 걸친 취재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를 바로 기록하기 위해서라도 진실한 증언을 남겨야 할 것이 아니겠냐"고 간절히 요망한 결과 김진하씨는 「Washington Today」지에 실린 김영훈 박사의 기사내용에 대하여 "확실히 틀림없다"고 확인하면서 말문을 열고 자상하게 이야기 하였다. 또 김진하씨는 "김영훈 박사 이외에도 워싱턴에 사는 언론인 두 사람에게 김대중씨에 관한 취재에 응한 바 있으므로 그 두 사람을 만나보면 증언의 신빙성은 명확해질 것이며, 김대중씨의 과거의 증언 이야기도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하고, 이 두 사람의 저널리스트를 만나보기를 권했다.
물론 필자는 그 중 한사람을 만나서 김진하씨의 증언과 「Washington Today」의 기사내용에 아무런 차이점이 없음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김진하씨는 김대중씨와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김대중씨의 출생지는 한반도의 서해안 최남단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이다. 하의면은 인구 1만 5천명이 사는 하의도라는 작은 섬이다. 그 하의도에서 1924년 1월 6일에 섬에서 출생한 김대중은 33년 4월 1일 하의도에 처음으로 신설된 하의보통학교 2학년에 입학했다.
한편 김진하씨의 출생지는 동 하의면의 안좌리다. 완좌리里도 안좌도라는 섬으로서 인구 천명도 안되는 작은 섬이다. 하의도와 안좌리의 거리는 500m 정도로 큰소리로 부르면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다.
이 두 사람은 5학년(1937년)때의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 본토의 목포 제일보통학교에 전학하여 그곳에서 처음으로 두 김씨가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보통학교를 졸업한 두 사람은 명문의 목포상업고교에 진학, 43년 3월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김진하씨는 만주의 건국대학교에 적을 두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에 편입하였고 김대중씨는 목포에 있던 일본인 해운 회사에 취직했다.
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으로 한국은 독립했고, 김진하씨는 와세다를 졸업, 한국에 진주한 미군정청에 통역관으로 취직했다.
독립된 한국에는 많은 정당이 생겼는데 그중에서 제일 먼저 탄생된 정당은 민족주의자인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로서 동년 8월 17일에 발족하였다.
김대중은 동월 26일 동회 전남지부에 입회하여 목포시지부 청년동맹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어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한국의 정치상황은 극히 혼란한 상태였고, 미군정은 동년 9월 건국준비위원회를 좌익으로 단정하고 해산을 명했기 때문에 동회 그리고 청년동맹도 해산되었다.
김대중씨은 46년 3월 목포에서 결성된 신민당에 참가하여 조직부장이 되었다. 동시에 북조선의 지원으로 창설된 남로당(남한국공산당) 행동전위부대인 민주청년동맹 목포지부 부위원장을 맡아 활동했다.
김대중씨은 47년 6월 목포시내에 있는 大成(대성), 南橋(남교), 西橋(서교) 파출소 방화사건의 주범으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이때부터 김대중씨은 미군정청과 경찰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 추적 당했다. 김대중은 48년 여름에도 전남 보성 경찰서 방화사건에 관여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한국 정부가 수립된 후, 한국내의 공산당 소탕작전이 전개 되면서 공산당에 가담한 자나 지지자들을 관리하는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이 생겼다.
한국정부와 미군정보 기관은 보도연맹이 관리하고 있던 자들을 특별관리 하에 두었으나, 한국전쟁 발발시 북조선군의 공세에 밀려 후퇴하는 도중에 그 관리 하에 있던 자들을 체포하여 수만명을 총살했다. 그 중에 한사람이 김대중으로, 그 위기를 앞에 말한 바와 같이 김진하씨가 구하였던 것이다.
◆ 김대중은 어떻게 책임을 질 작정인가?
당시 서울 미군정보기관의 근무하고 있던 김진하씨는 좌익세력의 활동이 활발해진 전라남도에 파견되어 목포지구에 주둔하고 있던 미해군부대에 배속되었다. 김진하씨는 그곳에서 조사과정을 통하여 김대중씨가 좌익활동가로써 추적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김진하씨는 목포의 유력자이기도 한 김대중씨의 당시의 처 차용애(車容愛)의 아버지인 차보윤(車寶輪)씨를 만나 김대중씨에게 좌익운동에서 손을 떼도록 설득을 한 적도 있었다.
이때 마침 김대중씨가 공산주의자 임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49년 2월 20일, 김대중씨가 태어난 고향 근처의 신안군 임자면 출신의 북조선 스파이며 남로당 민족전선 부위원장인 兪在埴(유재식)이 체포되었다. 그가 털어놓은 바에 의하여, 북조선 왕래때마다 김대중씨에게 활동자금이 제공되었던 사실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김대중씨는 광주의 전남경찰국에 체포되었다.
이때에도 장인 차보윤씨가 상당한 로비자금을 사용하는 한편, 김진하씨는 목포지구 한국 해군대장(韓國海軍隊長)이던 朴城哲(박성철)씨에게 김대중씨의 보석 협력을 의뢰하는 동시에, 미해군 대장에게 설득해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한 보람이 있어 김대중씨는 박성철씨의 신원보증을 얻어서 보석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김대중씨는 한국전쟁 휴전 후 정치가로 변신하여 어떤 뜻에서는 김진하씨에게 은혜를 갚게 되었다.
60년 4월「4.19 학생혁명(學生革命)」이 성공하여 민주당이 탄생했다. 김대중씨는 생명의 은인으로써 어떤 회사에 근무하고 있던 김진하씨를 찾아내어 김대중씨의 정치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장면 총리에게 부탁하여 김진하씨를 외무부에 과장으로 기용했다.
그 후 김진하씨는 외무부 아시아 담당 부국장까지 승진했는데 61년 5월의 「5.16군사혁명」으로 민주당 정권이 무너지는 바람에 정계를 떠났다. 그 뒤 일본에서 직업을 얻었으나 미국으로 건너가 영주했다.
김진하씨가 김대중씨의 생명을 구한 기록은 일본을 거점으로 한 맥아더 사령부에 소속된 정보부대(GHQ)의 기록에도 남아 있다. 또 월간지 「중앙공론(中央公論)」의 80年 7月호에 시바다 미노로(故人)씨가 「광주시 X란(광란?) 배경의 사람들」이란 제하에 기사속에 GHQ 의 정보를 인용하여 "김대중씨는 목포지구의 해군헌병대에 자수 직후 보도연맹에 검거, 구속되었다. 그 때 미군 CIC의 기록에 의하면 철수시 사살대상자로 지명되어 있으나 목숨을 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하여 김대중씨도 일부는 인정하고 있지만, 이번 김진하씨의 증언에서 새로 명백해진 사실이 많다.
김대중씨는 한국국민에 대하여 거짓말을 해온 것을 자뭇 사실인 것 같이 주장해 왔다. 김진하씨가 입을 열지 않았더라면, 총살 직전에 구출된 사실 등을 어둠속에 영원히 묻어둘 생각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김진하씨의 김대중씨 구출에 관한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는 한사람으로 현재 일본이나 미국 및 한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손충무씨가 있다. 손씨는 서울에서 발행되는 경향신문의 특파원으로 동경에서 생활을 한 경험도 있는 인물로서 그와 김대중씨와의 관계는 67年 6月의 한국 총선거부터 약 30년간이나 밀접한 인간관계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손씨는 별도로 김대중씨에 관한 미공개 사실을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지금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한국에 있어서 김진하씨의 증언내용이 널리 보도되었을 때, 언론계에 연줄이 많은 손씨가 어떠한 반응을 나타낼 것인가 궁금하다.
지금 한국에서는 80년 5월에 일어난 광주사건의 책임자에 대해서 全斗煥, 盧泰愚 두 전직 대통령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또 책임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러나 김대중씨는 피해를 입은 지지자를 속여 문책을 당하게 될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부정한 정치자금을 받는 등 스스로의 경력으로 국민들을 계속 몰아부친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
국민들의 김대중씨에 대한 관심은 내년의 대통령 선거와는 별도로 고조(高調)되기만 할 뿐이다.
Written by 山崎 一
<일본 월간지, 『政界』, 1996년 2월호(pp.114-119)에서 발췌>
출처 http://usinside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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