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다' 또는 '갈아치우다'의 어원은 언제부터 일까.
달마가 3천여 년의 시공을 넘어 치우를 만난 시점부터 시작된다.
중국 선종(禪宗)의 개조(開祖)는 달마대사(達磨)이다.
부처로부터는 28번째의 조사(祖師)로 여겨지고 있는 달마대사는 남인도 칸치푸람 태어나 기원 520년 120세에 대륙에 온 것으로 전설처럼 알려지고 있다.
달마가 기원전 2700여 년전 치우천황이 중국의 5악으로 알려진 하남성 숭산의 동굴에서 수련하여 붙여진 치우동굴에 찾아와 9년 동안 면벽 수도를 했다.
3천여 년 전의 치우를 해후하고, 선(禪)의 경지를 득했음이다.
수련 중 화룡(火龍)의 이적(異蹟)을 보아 화룡동굴로 불리다가 달마가 떠난 이후 달마동굴로 이름이 바뀌게 된 역사 기록이 지금도 소림사에 남아 있다.
치우천황은 한민족의 배달나라 14대 환웅(桓雄)인 자오지(慈烏支)임을 삼성기(三聖記)>는 밝히고 있으며, 성호사설, 규원사화에도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도 사기(史記)에 치우를 실제적 인물로 썼다.
치우천황이 득도한 동굴에 오랫동안 화룡(火龍)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곳에 보리달마가 찾아들었다는 인연이 무엇일까.
수 천년 풍상 속에 버려진 망각의 터가 새삼 우리의 기억을 되살려 줌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바로 하늘민족(天孫民族)의 시원과 사상이 우리 한민족이었음이 밝혀지고 있음이다.
치우천황의 위대한 한민족 사상을 달마대사가 이었다는 것.
사마천은 사기에 치우와 황제가 탁록대전(탁鹿大戰)을 벌였다고 썼다.
한족(漢族)들은 치우에 참패한 황제를 그들의 계보로 삼고 있다.
그러나 국내 문중 일부는 뿌리의 근원을 잃은 체, 다투어 황제의 후손이라 명기하는 신 사대(事大)에 몰입하고 있다.
치우를 배격해 오던 한족들은 이제 대형 동상을 세우고, 동이족 황제를 중국의 4조(四祖)에 넣어 떠 받드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전쟁의 신(軍神)으로, 고대의 위대한 통치자로 역사에 기록된 치우천황을 방치만 할 수 없다는 다급함이 보인다.
'우레와 비를 크게 내려 산하를 갈아치운다
(雲雨大作 山河改換之意也)'는 고대의 속언(俗言)은 10여 년 수 십 만 명이 싸운 세계 첫 대 전쟁에서 승리, 사방을 '쓸어버렸다'는 데서 '치우다' 라는 말로도 유래되었다.
치우천황은 우리 삶의 잠재의식 속에 자리잡아 달마의 선(禪)으로 이어져 면면히 살아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내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니,
스님께서 내 마음을 안정되게 해 주소서.〔我心未安 請師安心〕"
"마음을 가져오너라. 네 마음을 안정되게 해 주리라.〔將心來 與汝安〕"
"마음을 찾아보아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覓心了不可得〕"
"내가 너에게 이미 안심의 경지를 주었노라.〔與予安心竟〕"
《傳燈錄 卷3》
하북성(河北省) 숭산 치우동굴 앞,
한 때 도교를 신봉하여 경지에 오른 불혹의 신광(神光)은
흩뿌리는 눈발 속에서 한 밤을 지세웠다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달마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왼 팔을 잘라(斷臂) 올리며 결연한 마음을 보였다.
혹한의 눈보라(立雪無粟) 위에 피를 뿌리며 간구하는
간절한 마음을 읽은 달마는 혜가(慧可)라는 법명을 내리고,
부처님의 지혜를 전수했다.
이로써 혜가는 중국 선종(禪宗)의 이조(二祖)로 불리게 된다.
중국의 승려들이 오른 손만으로
합장하는 관습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치우동굴에서 면벽 득도한 달마,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내적 관찰과 자기 성찰에 의하여
자기 심성의 본원을 참구(參究)할 것을 주창한
달마는 선불교의 초조(初祖)가 되었음이다.
삼천이백여 년의 시공을 뛰어 넘어 치우와 해후했던 달마,
하늘민족(天孫民族)의 홍익인세(弘益人世) 사상이
달마를 통해 또 다른 세계를 깨우치는 첫 걸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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