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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신라의 삼국통일, 후대의 역사적 평가

신라의 삼국통일, 후대의 역사적 평가는…

일제시대까지 '
三韓一統'긍정적 인식 이어져

북한학계선 "외세업은 반쪽 통일" 평가 절하

   

신라의 삼국 통일에 대한 이후 왕조들의 인식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이후 신라 경주 중심의 골품귀족은 당연히 삼한일통 의식(三韓一統 意識 · 삼국을 한의 동일한 세 집단으로 인식하고 그 삼한이 하나가 되었다는 뜻)의 영향으로 인해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사실을 자기만족적인 입장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삼국의 동질성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 요소는 언어와 종족이다. 물론 언어나 종족은 선천적인 측면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삼국의 동질성을 이해하는 것은 제한적이다. 하지만 언어와 종족의 통일성은 문화 전반에 걸쳐 동질적이거나 혹은 동질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를 비롯하여 9세기 이전에 씌어진 여러 금석문에서 확인되고 있다.

고려 시대의 인식내용은 '삼국사기'에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은 신라계의 문벌귀족으로서 신라 삼국 통일이 갖는 긍정적인 의미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한편 '삼국사기'의 이와 같은 인식내용은 조선시대 전기의 대표적 편찬사서인 '삼국사절요'와 '동국 통감'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이와 같이 전근대사회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은 조선시대 후기를 거쳐 근대적인 역사서술을 표방하고 있던 개화·일제강점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다만 근대사회에서 제시된 신라의 삼국통일에 관한 견해 가운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내용은 바로 일본인 학자에 의한 긍정론이다.

일찍이 일본의 역사학자 하야시 아리스케가 '조선사'에서 '신라의 통일'로 정의한 이래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은 '신라의 반도 통일' 등으로 정리하였으며, 일부 사학자들은 근대사학의 미명 아래 그 내용을 비판 없이 수용했다. 그러나 일본인 학자들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 한 의도는 그들의 당면한 전략목표였던 만주, 즉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의 범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사관에서 연유하는 달갑지 않은 사학사상의 유산이었다.

한편,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북한 학계의 입장은 1979년에 출간된 '조선전사'4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 따르면, 신라가 인민 대중의 당나라 침략 반대 투쟁에도 불구하고, 계급적 이해에 얽매인 봉건 통치배의 나약성과 사대굴종 사상으로 말미암아 국토의 남부를 통합하는 데 그침으로써 후기(통일)신라로 전환한 사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또 압록강 이북의 옛 고구려 땅에서 그 유민에 의한 지속적인 당나라 침략 반대 투쟁의 결과로서 발해가 세워진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북한학계가 고조선-고구려-발해의 계승을 역사의 정통으로 인식하고, 고려를 최초의 통일왕조로 파악하는 북한 정권의 현재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김소현 LC교육연구소 선임연구원

 

출처: 신라의 삼국통일, 후대의 역사적 평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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