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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고려 태조 왕건 영릉의 진실

왕건의 묘는 1942년 일본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땅굴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왕건묘(王建墓)

10세기 초 혼란기에 성도를 중심으로 전촉(前蜀:903~925)을 세운 왕건의 묘로 永陵이라고 부른다. 적사암으로 만든 묘실은 전실과 중실, 후실로 나뉘고, 전 길이 23.4㎝로 관좌 양측에는 12위의 역사상(力士像)이 늘어서 있고, 동·서·남의 3방에는 24위의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기생상이 새겨져 있다. 이 능묘는 특히 당시의 무용, 음악 등의 예술 분야에 관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옛날에 제왕들의 묘에는 비석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도굴의 위험성 때문에 철처한 경계 경비를 하던가(守墓人) 아니면 아예 무덤 자체를 찾지 못하게 숨겨버리곤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묘비를 세우는 풍속은 조선시대에 유교의 영향을 받아서 유래 했을 것으로 봅니다만, 이건 저의 개인적인 견해 일 뿐입니다.

지금까지 발견 된 고대 무덤들에는 묘지주인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명문이 발견 된 적이 거의 없으며 묘지석 이나 묘비가 있다면 그것은 고대가 아닌 조선시대 이후, 즉 중세이후의 유물입니다.

특히 칭기즈칸으로 유명한 유목민족들의 장례 풍습은 더욱 뚜렸한 모습을 보여 주는데 하늘과 사람과 땅이 혼연일체가 되어 승화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묘비를 세우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묘비를 세우는 것은 하늘에 죄지은 자를 표시해 두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고인돌은 부족장이나 큰세력가의 무덤이었다기 보다는 하늘에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을 매장하고 그 표식으로 돌을 엊었을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사천성 성도(
成都)에 왕건의 묘가 있는데 묘비가 출토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묘비가 없었다면 땅의 신에게 묘지를 구입하는 매지석이 있었을 것도 같은데 그런 유물은 있다는 소리를 못들었습니다.

있었어도 고려태조 왕건의 실체를 파악 할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되었다면 아마 없애버리거나 감추어 두었겠지요.       

율곤선생님께서 최초로 사천성 성도(成都)에 왕건의 릉이 있다는 것을 고증과 함께 '상고사의 새발견' 이라는 책에 소개했는데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이 중국 현지를 방문하여 사진을 찍어 오기도 했습니다.


사천성 성도(
成都)에 왕건의 묘는 1942년 이곳 주민들이 일본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방공호를 파다가 우연히 발견이 되었으며 1961년 국무원에 의해 전국중점 문물보호 단위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前蜀王王建(AD.847-918) >

1993년 율곤선생님께서 답사하실 때는 내부에서 사진촬영을 하지 못하게 엄격하게 통제를 했다고 하던데 요즘은 제법 많은 사진을 접할 수 있게 되었나 봅니다.

중국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역사의 진실을 공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왕건을 폄하하고 깍아 내리기 위해서 인생유전이라는 현판에 전촉(前蜀)(903~925) 의 왕 으로 소개하면서 낭인(떠돌이 불량배) 출신이라고 기록해 놓았으며 현지 관광가이드는 그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지에 살다가 우리나라에 취업하러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가우리묘' 라고 한다니 '가우리묘'는 우리말로 고려의 묘 입니다.

 

아래의 주소를 방문하시면 관련 사진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한민족 상고 대륙사 관련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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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성 성도 박물관&성도 시내의 영릉로에 있는 전촉왕 왕건묘 영릉

영릉안에는 왕건이 착용했다는 옥대가 생생하게 전시되어있고 그 밑 붉은 색은 왕건의 옥쇠를 담는 옥쇠함이 변하지 않고 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 우적도에 가 표시되 있는 위치; 요동,서의 기준되는요().대륙고려의 시작은 대륙 태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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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성 왕건묘 영릉 입구

 

청뚜(성도)의 영릉로에 있는 5대 10국의 혼란기의 전촉(前蜀) 왕(847년918년)을 지낸 영릉 왕건묘(王建墓) 묘의 규모는 높이 15m, 직경이 약 80m이고 묘실은 약 23m이다. 왕건은 전촉을 세운 후 성도를 도읍으로 정하였었다. 능묘의 문에 들어서면 3m 높이의 적인상과 중앙 관좌측면에 각각 표정이 다른 24명의 주자(奏者)로 이루어진 궁전 악대와 골격이 우람한 12인의 역사상의 석조가 있다. 촉한시대의 음악 예술적 귀중한 자료 중 하나.영릉에 있는 영릉 박물관에 소장된 왕건이 찼던 옥대와 왕건이 사용한 옥쇄함. 현재 학계에서는 사천성의 전촉왕 왕건과 반도 고려왕건을 동명이인으로 보고 있으나 율곤 이중재를 위시한 재야 민족사학계에서는 개성은 고려의 허도이며 고려는 대륙까지 근거가 있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단재 신채호 선생, 백암 박은식 선생을 비롯, 해방 이후 한암당 이유립, 문정창, 복초 최인 등의 민족사학자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방촌 임균택(대전대 설립자, 철학박사. 대전대 부총장 역임) 선생은 사천성 성도 영릉의 왕건묘가 바로 우리의 고려왕조 왕건묘라 한마디로 잘라 일축하고 고려는 한반도에 없었고 그 수도는 쓰촨의 청뚜(성도)였으며, 섬서성 서안으로 옮겼다가 지금의 산서성 임분(요,순의 수도)인 평양으로 천도했다가 북경인 연경으로 다시 옮겼으며 다시 선양(심양:25대 충렬왕때 천도)으로 가서  고려말 주원장에게 반도로 쫓겨들어가 마침내 이성계에게 멸망했다고 주장한다.(후일 자세히 소개한다-위화도는 섬도 아니며 압록강 가운데에는 그렇게 많은 군사를 주둔할 섬이 없으며 중원대륙 한복판에 있으며 그 지명이 있다)) 방촌은 공양왕때 부터 고려왕조의 주력세력이 약화되어 고려말에 중심세력이 반도 개경으로 쫓겨가 정몽주 역시  반도 개경의 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죽은 것이라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한(지나) 중심의 손문이 동이 중심의 왕조(청,명,원,고려,금,요,발해,통일신라,당,송,고구려,백제,기자조선) 멸망이후, 국민당의 국민정부를 세웠으나, 국민당 정부의 장개석이 공산당의 모택동에게 쫓겨 그 정통성을 빼앗긴것과 같이 천자국 고려왕조도 홍건적을 이끈 주원장에 의한 명(조선)에 의해 수도 선양(심양)에서 멸망하니 고려왕실과 중신은 반도 개경(개성;따라서 허도)으로 망명하여 마침내 이성계에게 멸망당했다는 것이다. 천자국의 정통성을 가진 고려가 망하고 마침내 주원장 세력휘하로 자진해 들어간 이성계 조선에 의해 정통성이 왜곡되었다는 얘기다. 이성계는 여진족이었지만 대륙사관으로 보면 같은 동이 한 민족이라 문제될 것 없으며 주원장 역시 우리 한겨레 핏줄로 아예 명나라를 유명조선이라 칭호하는 방촌은 종교적인 금산사가 아닌 정치사적으로 견훤이 신검에 의해 유폐된 금산사는 감숙성 고란현 서북쪽 백탑 산중에 있다 하고(금산사는 남경 위 양자강가에도 있음),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이 있었던곳은 사천성 부능현 동쪽이라 하고(강동6주도 사천성, 산서성 등 대륙소재), 고려의 강화 천도는 반도내 강화도가 아닌 호남성 맨아래 왼쪽에 있는 강화현으로 당시 서경은 반도내 평양이 아닌 섬서성 서안으로 개경 역시 반도의 개경(현재(개성)이 아닌 산서성 평양 분주(현재의 임분)라 하고 당시의 한양성은 반도내 지금의 서울 한양이 아닌 복건성 포성현이라 말한다. 삼별초가 도망 간 제주는 산동성 거야현인데 우리의 제주도와 한문이 똑같은 제주 제북군이라 했다 하며(방촌의 사관으로 상고사를 보면 서긍의 고려도경에서 송의 사신이 임안(항주)의 전단강을 배타고 지나며 풍광좋은 고려의 땅을 지나고 있다는 서술이 곧바로 이해된다), 고려의 정사인 정인지 고려사는 왕건이 당나라 숙종의 혈통임을 기록하고 있으며 세종의 학우이자 신료로 세종의 명을 받아 극비리에 사서를 대대적으로 소각한 김문기 가문의 유훈은 개성이 허도임을 밝히고 있고 북벌파 최영을 친 이신벌군의 역적 이성계부자가 주원장의 유교를 들여와 존주사대를 통해 지나를 천자로 모시는 대신 제후로서의 통치적 명분을 얻고(민족 사학자 복초 최인은 이신벌군의 역적이자 북벌파 최영을 친 사대주의자 이성계가 북벌파를 치고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세운 조선왕조의 통치명분을 얻기 위해 주원장에게 넙죽 엎드려 조아리고 천자국의 지위를 내팽개치고 중화 사대주의의 썩은 망건을 받아써 중화의 노예가 되었노라 말하고 있다)동이족 혈통인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저지른 것 처럼 여진족인 이성계 가문을 숨기기 위해 대대적인 분서갱유를 저질렀다고 한다. 정용석은 이성계의 출생지 및 성장지에 대해 이성계는 타타르인이라는 제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학도는 역사의 사설(史實)들을 연구 발굴함에 있어 지금껏 조명(照明)되앉던 쪽에 중점을 물 필요가 있다. 특히 국가나 민족의 기원(起源) 및 왕조(王朝)의 시원 문제에 대해서는 각별한 살핌이 있어야한다고 보여진다.역사에 있어 국가와 민족의 기원에 대한 사화(史話)나 왕조의 시말(始末)에 대한 기록들에는 다른 분야에서 보다 심각한 조작(造作)이 자의 타의로 수반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가(史家)들이 나름대로의 의미 있는 사관(史觀)을 보고자 한다면 역사 속의 긍정과 부정을 모두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그러면 기록에 있어 곡필(曲筆)이 필요에 의해 어떻게 생기었으며 해설 속의 에고이즘 존재 이유도 알게된다. 어쩌면 사가(史家)들이 선행할 의무는 역사서라는 기록물들의 실체를 긍정과 부정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닌 모두를 이해하는 것이어야 할 것으로 보여진다. 필자는 여기서 14C말 이성계(李成桂)란 군벌(軍關)에 의해 시작되는 조선왕조(朝蘇:李民)에 대한 시원(始原)을 새로운 관점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근세(近世)에 해당하는 왕조의 사건이자 인물들이기 때문에 왕조의 개국성격과 인물들에 대한 긍정과부정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많은 개진(開陳)이 있었기 때문에 이미 밝혀져 있는 내용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고자 한다. 단지 이성계란 폭력 군벌이 창건했다는 조선국지(朝解國地)의 시원지와 창국장소에 중점을 두어 14C말 조선의 개국을 말하고 싶고, 이성계(李成桂)일족의 고향 땅과 출향지(出椰地)을 기준으로 14C말 이후의 조선역사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역사의 성격은 연속성을 논하고 싶어하지 토막 토막의 원리를 가지고 있지않다. 토막이라는 부분(部分)은 결국 전체(全體)속에 녹아있기 때문에 역사에 있어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문제와 의문을 해소하는데 주안점으로 작용한다..

개국 태조 이성계(李成桂)에 대한 내용을 보면, 그를 3척검두안사직(三尺劍頭安社樓)이라고 쓰고 있다. 안사(安社)는 이성계의 고조부로써 ()의 다루하치(達種花亦)였으며 고려의 화주(和州)이자 원()의 쌍성(홈총관부의 총독(집정관)을 했던 인물이라고 쓰여져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이성계는 삼척검(三尺劍)올 휘두르는 무관집안 이안사(李安社)후손으로, 조를 세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성계의 부친 환조 이자춘(李子春)까지 몽고인(고려인이 아님)으로써 원()나라에서 부여한 관직(삭방도병마사)을 했었다. 이성계의 아버지 몽고식 이름은 오노사불화(吾暑思不花)였다..이성계 집안은 고조부 이안사(李安社)가 몽고인으로써 몽고(원)에서 고전지역에 파견한 72명의 달로화적(다루하치)의 한사람이었다. 그가 집정관(점령지 총독)으로 부임한 곳이 쌍성(雙城)이였고 고려의 화주(和州)였던 것이다.이성계에 이르기까지 5대(五代)가 쌍성의 군벌 및 호족(豪族)으로 군립하고 있었고, 이성계의 외가(外家)는 쌍성부 소속의 영홍진(永興鎭)에 있었다...

 

출처: 왕건의 묘~영릉~고려제국의 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