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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위례성(慰禮城)의 위치 텐진의 서남쪽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비류(沸流)와 온조(두 사람은 바로 구태(仇台)의 아들)가 남쪽으로 와서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 즉 삼각산(三角山)에 올라가 살 만한 땅을 찾아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기를 원하자, 열 명의 신하가 간하기를, "이곳 하남(河南) 땅은 북쪽으로 한수(漢水)를 띠고 동쪽으로 고악(高嶽)에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 옥택(沃澤)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대해(大海)를 격하였으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미추홀(彌鄒忽) -지금의 인천(仁川)이다.- 로 돌아갔다. 그러자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이때는 한나라 성제 홍가 3년이었다. -원주(原註)에 이르기를, "비류와 온조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넜다." 하였다

   

한수가 있는 곳은 고려의 광주로 당산 일대임이  증명되었다.

미추홀은 난푸이다.

그럼 위례성을 찾아보자 분명히 하남즉 황하남쪽이라 했다. 당시기록에는 河자가 들어가면 무조건 황하였다

   

8년 봄 2월, 말갈군 3천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했다.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자 적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왕은 정예군을 선발하여 대부현까지 추격하여 단번에 이기고, 적병 500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가을 7월, 마수성을 쌓고 병산에 목책을 세웠다. 낙랑 태수가 사람을 보내 말했다.

온조왕  백제본기

   

말갈이 침입하고 마수성이 나온다. 마수성과 마수산은 그위치를 안다. 바로 자금성 북쪽이다.말갈은 당시에 난하일대에 있었다.

   

주필산 = 마수산

   

 

거란국지의 지리도에 말갈은 난하에 있다. 즉 위례성은 동북에 말갈군이 버티고 북쪽에 주필산과 자금성이 있는 형태이다. 그러니 당시의 황하남쪽이 맞다.(고대의 황하는 텐진으로 흘렀다 그러니 거기가 하남이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변경을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가을 7월, 한산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렸다. 마침내 국토의 영역을 확정하였다.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이 경계이며, 서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온조왕   13년백제본기

   

낙랑군과 별개로 낙랑국도 있는데 난하근처에 살았다. 이는 호동왕자가 옥저땅에 갔다가 낙랑국왕을 만났다는 고구려본기를 보면 알수있다(옥저는 난하동쪽에 있다)  패하역시 황하의 줄기이다. 서쪽바다는 황하를 말한다. 고대지리에 산둥반도는 섬이라고한다. 게다가 지금 간도일대도 아주 오래전에는 바다가 침투해있었다고 한다.

17년 봄,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태웠다.

온조왕  백제본기

   

   

移都於泗沘. 今扶餘郡. [彌雛忽. 仁州. 慰禮. 今稷山.]

사비로 수도를 옮겻는데 지금 부여군이다. 미추홀은 인주이며 위례는 직산이다.

東明王第三子溫祚. 以前漢鴻佳三年癸酉. 自卒本扶餘. 至慰禮城. 立都稱王. 十四年丙辰. 移都漢山.

[今廣州.]

동명왕 세째아들 온조는  중략 졸본부여에서 내려와서 위례성에 이르러 수도를 세웠다. 나중에 한산으로 이동했는데 지금의 광주이다.

삼국유사

 

고려의 광주는 당산시 근처이다.

백제 수도는 근처로 옮기지 갑자기 먼데로 옮기지 않는다. 위례성 한성 전부 근처에 있다. 졸본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요나라동경(난하의 천안시)서쪽이라고했다. 즉 지금의 베이징일대이다. 그러니 온조가 가봤자 어딜가겠나 그 바로 남쪽이지

   

   

漢州 本高句麗漢山郡 新羅取之  景德王改爲漢州 今廣州

한주는 고구려땅인데 신라가 차지했고 지금 광주이다.

 삼국사기 지리지

   

   

又命太祖伐廣州-忠州-唐城-靑州

태조왕건이 광주 충주 당성 청주를 차지했다.

고려사

   

청주는 산둥성 청주이다. 송사에도 왕건이 산둥성청주에서 등극했다고 써있다. 믿기 힘들면 원문을 찾아보라  송사에는 고려땅은 기주에서 출발했다고 기록되있다.

   

白城郡 本高句麗奈兮忽 景德王改名 今安城郡 領縣二 赤城縣 本高句麗沙伏忽 景德王改名 今陽城縣 蛇山縣 本高句麗(下恐有蛇山(見勝覽)) 景德王因之 今稷山縣.

地理二

백성군은 원래 고구려의 나혜홀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하였다. 지금의 안성군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적성현은 원래 고구려의 사복홀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양성현이다. 사산현은 원래 고구려의 현으로서 경덕왕도 이 이름을 따랐다. 지금의 직산현이다.

삼국사기 지리지

   

   

본래 위례성(慰禮城)으로 백제(百濟)의 온조왕(溫祚王)이 졸본부여(卒本扶餘)로부터 남쪽으로 와서 나라를 열고, 여기에 도읍을 세웠다. 뒤에 고구려에서 이곳을 사산현(蛇山縣)으로 만들었고, 신라에서도 그대로 사산현(蛇山縣)으로 하고, 백성군(白城郡)의 영현(領縣)을 만들었다. 고려 초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천안부(天安府)에 소속시켰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산천】 사산(蛇山) 성거산(聖居山)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충청도 직산현

   

   

조선은 지명을 옮겼지만 유래는 그대로 가르쳐 주었다. 조선초 고토회복에 대한 열망때문에 지리지가 늦게 출판되었다. 혹시 조선이 고려의 산둥을 되찾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래서 지명유래만큼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안북하(安北河) 를 둘러 관성을 쌓았고, 또 철관성(鐵關城) (철령(鐵嶺)이며 또한 철관(鐵關)이라고도 일컫는다)을 쌓았다.

○ 말갈이 아달성(阿達城)에 입구(入寇)하였고, 성주(城主) 소나(素那)가 죽었다.

소나는 백성군(白城郡)지금의 안성군(安城郡) 사산(蛇山)(지금의 직산현(稷山縣) 진산(鎭山)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침나(沈那)는 힘이 남보다 뛰어났다. 사산 땅은 백제와 서로 맞닿아 있었으므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서로 싸웠는데, 침나가 싸울 때마다 그가 나가는 곳에는 적의 견고한 진()도 어쩔 수 없었다

을해년 문무왕 15년(당 고종 상원 2, 675)

   

철령은 지금 요하에 있지만 원래는 난하에 있었다. 신라가 그곳을 장악했음을알수있다. 물론 발해가 다시 되찾았다.  직산에는 사산과 성거산이 있다.

   

고려왕이 대목군(大木郡)) 에 행행하였다. 술사 예방(倪方)이 이르기를,

"동서 도솔(東西兜率) 지금의 천안(天安) 이 삼국의 중심이 되니, 다섯 용()이 구슬을 다투는 땅입니다. 만약 성루(城壘)를 쌓고 관병(觀兵)하면 삼국을 통일하여 왕이 될 것입니다."

하니, 고려왕이 이 말에 좇았다. 또 그곳은 남도의 요회(要會 중요한 도회)이므로, 이에 탕정(湯井)ㆍ대목ㆍ사산(蛇山)으로 나누어 천안부를 삼아 도독경인년 왕 김부 4년 진훤 39년 고려 태조 13년(후당 명종 장흥(長興) 원년, 거란 태종 천현 5, 930을 두었으며, 대승(大丞) 제궁(帝弓)을 사(使)로 삼고, 원보 엄식(嚴式)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요주(遼州) 시평군(始平軍)은 본디 불녈국(拂涅國)의 국성(國城)인데, 발해 때에는 동평부였다.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친히 정벌하였을 적에 이세적(李世勣)이 함락시킨 요성(遼城)과 고종(高宗)이 조서를 내려 정명진(程名振)ㆍ소정방(蘇定方)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정토하게 하였을 적에 신성(新城)에 이르러서 크게 격파한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 태조(太祖)가 발해를 함락시킬 적에 먼저 동평부를 격파하고 백성들을 옮겨서 채웠다. 옛 동평부는 이주(伊州), 몽주(蒙州), 타주(陀州), 흑주(黑州), 비주(比州) 등 다섯 주를 도독(都督)하며, 관할하는 현이 모두 18개인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요하(遼河), 양장하(羊腸河), 추자하(錐子河), 사산(蛇山), 낭산(狼山), 흑산(黑山), 건자산(巾子山)이 있다

   

사산은 동경도 즉 난하의 동경이 관할하는 구역에 있다.

   

반산역(盤山驛)에 이르니, 지휘(指揮) 양준(楊俊)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차를 대접했습니다. 역성(驛城) 북쪽에서 바라보니, 흑산(黑山)ㆍ기산(岐山)ㆍ사산(蛇山)이 있는데, 그 산들은 모두 의무려(醫巫閭)의 동쪽 지맥(支脈)이었습니다

표해록무신년(1488, 성종 19) 5월

   

의무려산은 원래 난하서쪽에 있었다.

   

[주D-001]의무려산(醫巫閭山) : 광녕우위(廣寧右衛)의 서쪽 5리에 있는 산이며 사산(蛇山), 반산(盤山), 첨산(添山), 백운산(白雲山), 안산(鞍山) 등 12개의 산으로 이어졌다. 《讀史方輿紀要 37 山東條, 3 遼東邊圖

조천기 갑술년 만력(萬曆) 2년 (1574, 선조 7) 7월

   

   

   

《삼국유사》에,

"한 소제(漢昭帝) 시원(始元) 5년에 조선의 옛땅인 평나군(平那郡)과 현도군(玄菟郡) 등을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로 삼았다

   

한나라가 설치한 평주를 지네들 기록에서 찾아보자 

   

[]碣石海畔山也在今平州東

후한서

평주동쪽에 갈석산이 있다.

   

아래 지도에 갈석산. 요나라남경 (현재 베이징서남쪽)에서 텐진가는 방향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있다

   

[]襄平屬遼東郡故城在今平州盧龍縣西南

후한서

양평은 요동군에 속하는데 평주 노룡현 서남에 있다.

   

 

노룡은 원래 위치보다 동으로 이동했다 현재 위치로 보더라도  양평이 베이징근처임을 알수있다.평주의 동쪽 경계가 갈석산으로 현재의텐진일대인데 평주를 요하동쪽으로 표기하는 매국노들을 이해할수없다. 문맹인가 고집인가 매국인가?

   

《여지승람》에,

"우봉현(牛峯縣)의 성거산(聖居山)은 일명 구룡산(九龍山)이요, 일명 평나산(平那山)이다."

   

《삼국유사》에 또,

"지금 평나는 있고 진번은 없으니, 아마 땅은 하나인데 이름이 둘이리라

   

결국 위례성은 직산이며 그일대는 사산과 성거산즉 평나산이 있으며 평주와 가깝다. 결국 고대에 텐진일대로 흐르던 황하바로남쪽이 위례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