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역사에 있어 신라가 지은 죄가 정말 용서받을 수 없을 만큼 큰 것인가.
신라가 가야까지 포함한다면 4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비판을 받는 이유는, 첫째 영토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과 둘째 당나라라는 외세를 끌어 들였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우선 영토적 한계문제부터 살펴보자.
신라는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경계를 확정하였고, 이 영토를 지키기 위해 당나라와 전쟁을 치른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비록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최선을 다한 결과였지만, 고구려가 가졌던 대부분의 북방영토를 회복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당시 당나라의 전력과 신라의 전력을 비교해 볼 때, 고구려 영토 전체를 모두 회복하는 일은 대단히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정치적으로 봐서도 아직 일본의 남방침입을 근절하지 못한상태에서,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백성들을 끊임없이 전쟁에 동원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 하지 못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봐서도, 고구려 영토 전체를 회복하는 일이 불가학력적이었다 하더라도, 최소한 삼국통일의 대의를 살리기 위해서는 고구려 도읍인 평양성 정도는 회복했어야 되지 않나 싶다. 물론 671년 4월 압록강을 건너 옥골지역까지 군사를 진출시킨 기록이 있긴 하지만, 압록강 유역의 영토를 확보하지는 못하였다.
이후 당나라는 평양지역에 말갈족과 거란족까지 합세시킨 10만 대병으로 신라 북쪽경계를 위협하였고, 신라는 675년 매초성 전투를 기점으로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대동강 이남지역의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처럼 훌륭한 전과를 올렸다면, 안동도호부가 요동지역으로 옮겨지는 틈을 타서 공격했다면, 충분히 평양성을 회복할 기회는 있었다고 보여진다. 신라의 영토수호 노력은 충분히 평가되어야 하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영토를 회복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여주지 못한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남북국시대의 우리영토 (대고려지도)
그렇다고 해서 북방영토가 곧바로 상실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지나친 패배주의와 상실감으로 보인다. 발해는 우리나라 역사가 아니란 말인가? 발해가 고구려 영토의 얼만큼을 회복하였는지, 아니면 더 확장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공식적으로는 발해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
영토범위 문제는 연구자마다 다른의견이 있을 수 있고, 정설이라 하여 반드시 역사사실과 일치한다고 볼수 없지만, 확인 가능한 범위내에서는 가장 사실과 근접한 다수의 공동된 의견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역사적 고증을 할 수 있는 영톰범위가 그만큼 넓다는 것은, 발해가 고구려 영토의 상당부분을 회복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발해 영토에는 한반도 북부도 포함된다. 신라의 영토적 한계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발해의 성립과 발전을 지나쳐 버리는 자세는, 결코 올바른 역사적 관점이라 볼 수 없다. 북방영토에 대해 보다 확고한 역사적 관점을 정립하고 싶다면, 고구려에서 발해, 그리고 고려시대의 영토회복 노력과 조선시대 간도문제로까지 이어지는 우리나라 북방영토사에 대해 보다 거시적인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과거 고구려 패망에 대해서 집착하고 극단적으로 몰아 갈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헌법상 우리나라 영토인 간도에 대해 어떻게 주권을 확립해 나갈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즉 우리나라는 북방영토가 축소된 면이 있지만, 결코 완벽하게 상실한 적은 현재에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잃어버려서 어쩔 수 없고 그 모든 책임은 신라에게 있다는 식의 패배주의에 사로잡혀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영토적으로 상당히 축소되긴 하였지만, 백제영토를 개척하고 고구려 출신의 사람들을 대거 받아들여, 대동강 이남의 영토와 우리민족의 고유 문화를 지킨 신라의 역사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18세기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조선전도, 요동의 조선성책을 기준으로 북방영토가 분명하게 표시된 것을 볼 수 있다.
둘째, 당나라라는 외세를 끌어 들인 문제이다. 물론 우리민족의 통일과정에 외세가 개입하였다는 것은 매우 큰 문제점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국가가 멸망직전의 상황까지 몰렸는데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고구려는 분명 삼국통일할 기회가 있었다.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때까지 내려가지 않더라도,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멸망직전 단계까지 몰아갔다. 아직 신라와 당나라간의 연합이 성립되기 전까지 충분히 기회가 있고 또 있었다.
그런 기회속에서 신라를 멸망시키지 못한것은 백제와 고구려의 연합의 견고하지 못한 탓이지, 순수하게 혼자의 힘으로 여제동맹을 막고 일본의 침략까지 막은 신라의 잘못은 아니다. 나당연합은 그 다음의 문제가 아닌가?
이렇게 까지 말하면 의례 '신라찬양론' 이 나온다. 하지만 신라를 찬양하자는 얘기가 아니라 역사를 좀더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자는 것이다.
국가가 위기에 몰렸는데, 다른 나라에게 구원을 청한 일이 그렇게 잘 못되고 비판받을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또 그 상황에 처한 원인이 단순히 신라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이웃나라의 집중적인 침공에 의한 것이라면, 충분히 외교적 구원요청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와같은 외교활동조차 비판받을 일이라면, 이세상에 정당화 될 수 있는 외교활동은 어느시대 어느 장소에서도 없을 것이다.
흥선 대원군처럼 100년이고 1000년이고 쇄국정치만 한다고 국가가 발전하지는 않는다. 마야문명이나 잉카문명은 고도의 석기문명과 청동기 문명을 발전시켰지만, 고립적인 문명을 고수한 끝에 겨우 수백여명 밖에 안되는 유렵의 침략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우리나라 조선역시 고립주의를 고수하다가 결국 일본의 침략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물론 힘이없다는 이유로 함부로 빼앗고 강탈하는 제국주의 만행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죄악이다.
신라의 대당전쟁이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되묻고 싶다. 그렇다면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일본까지 합세하여 집중 공격당하는 시점에서, 신라는 어떻게 해야 되었겠는가?
그대로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지켜본다?
물론 스스로의 힘으로 그 모든 것을 극복 할 수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신라가 왕조의 안위만 생각했다면, 무리하게 고구려 군민들을 받아들이고 백제 영토를 확보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당나라 부역의 대가로 얻어진 영토라고 하지만, 당나라는 이미 백제멸망시점부터 당군을 사비성등지에 주둔시켜 놓았다. 결코 부역의 대가로 저절로 얻어진 땅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고구려의 군민들을 받아들이면, 당나라와의 일전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은 누구나 쉽사리 알 수 있는 수순이었다.
그런데도 신라는 고구려 군민들을 대대적으로 받아들였다.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신라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것은 신라가 혼자의 힘으로 고구려, 백제, 일본 3국연합을 모조리 극복하고 한반도 전체를 통일하는 상황이다. 가장 좋은 상황을 만들 수 있는 국력을 배양시키지 못한 것에는, 분명 신라의 책임도 있다. 그러나 신라의 대당전쟁은 결코 신라 혼자의 힘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고구려 군민도 있었고, 가야 군민도 있었으며,백제의 군민도 있었다. 즉 우리민족 모두가 함께 하였기에, 이룰 수 있었던 역사이다.
그런 역사가 왜 깍아내려지고 비판받아야 하는가? 우리가 우리역사를 깍아내린다면 도데체 누가 우리 역사를 알아준단 말인가....
백제와 고구려의 통일 가능성은 더이상 거론하지 말자, 충분히 통일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하지 못했던 것은 재차 강조하지만 신라의 잘못이 아니다. 당나라 침공이 지속되는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당태종이 사망한 틈을 타 백제영토를 거쳐 신라 경주를 직공하였다면 충분히 단 시간내에 신라를 멸망시켰을 수도 있다.
또 나당연합처럼 백제로 하여금은 육로로 공격하게 하고, 고구려는 해상을 통해 경주에 직접 상륙하여 멸망시키는 전략도 있었다.
역사를 보는 관점은 다양하고, 어느 누구의 관점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흑백 논리에 치우쳐 신라가 했던 일은 무조건 나쁘다는 식의 역사해석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신라역사 역시 우리나라 역사이기에, 그 역사를 부끄럽고 나쁜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결국 역사에 대한 상실감이나 패배주의에만 물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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