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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조선왕조 이성계 위화도 회군의 진실

고려의 중원회복의 출병과 위화도 회군의 전략적 평가

 

군사전략적 측면에서 고려군의 중국정벌과 위화도회군에 대해 살펴 봅니다.

이성계의 4불가론 중에 여름철에 화살의 아교가 녹아 출병반대한다고 한 4불가론이라는 사기극 연출의 내용이 있습니다.

또, 관련된 다른 이유가 더위와 장마때문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여름4월이라 하면 지금의 5월쯤이고 5월 23일 위화도에서 회군을 했으면 지금의 6월 23일경이 됩니다.

지금의 6월 23일(5월 23일)에 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했을 시기에 이미 요동지방과 위화도 지역에 장마가 계속되고 있었고 많은 비가 내려 강을 도강하는 도중에 병사들이 떠내려가 죽었다고 했는데 이때는 지금으로 말하면 6월 초순경이 됩니다.

 

이때 강물이 불어나 도강을 하지 못할 정도의 장마가 계속됐다는 것이며 그곳이 압록강지역과 요동지역 이라는 것입니다.

 

이성계가 출병하여 회군한 지역을 한반도 압록강 지역으로 하든, 영하성의 중위(中衛)지역으로 하든, 4월과 5월 초순(지금의 5월과 6월 초순)에 장마가 진다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다시 말해 앞뒤가 안맞을 뿐 아니라, 현실과도 관련없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요동에서는 최영의 명에 따라 이미 발해 려진의 3만군이 작전을 개시하고 있었는데 오죽하면, 당시 발해 려진군 대장이 "성계군이 이상하다" 고 최영에게 보고한바 최영과 우황이 직접 개성까지 내려왔었다.

말도안되는 건 너무도 뻔한데 아무 객관적 생각없이 식민사관으로 쇠뇌되어지고 맹신하다보니 지금까지도 화교들의 세상이 이어지고 있는것입니다.

 

또하나의 사후 증거

 

그 당시 국제적 상황은 고려에게 아주 유리했고, 고려는 무패의 군대였습니다. 만약, 주력인 고려 군대와 만주의 별동대(여진군) 그리고 몽골의 기황후 군대가 계획대로 중원정벌을 실시했더라면 명나라는 멸망을 기다릴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하여 고려를 장악한후에 명나라로 보고서를 보낸 사신을 접한 명왕 주원장이, "읽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고, 얼굴이 종이처럼 하얗게 되었다" 는 당시 기록이 연사에 있는바, 그 당시 명나라 수도는 양자강 이남에 있었고, 주원장의 기반역시 양자강이남에 있었습니다

명은 아직 국가 체제도 제대로 갖추어지지도 않았고, 양자강 이북은 주인없는 땅이었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주원장의 입장에서 아직 제대로 정비되지않았던 상황이었는 바, 최영으로 인해 안정된 고려에 비해 취약한 당시의 명나라 상황이었지요.

주원장은 당시 상황에서 제대로된 방어가 불가능했다는 군사전문가들의 전략적 평가 입니다.

 

전략적으로, 명나라가 고려의 대군을 방어하려면 군을 모아 요동을 넘기 전에 요서지방에 방어선을 구축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대군을 집결시키고 또 공격하기 위한 대대적인 준비와 함께대원정을 했어야하는데 이건 탁군에서 출발하는 수나라의 원정보다 더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양자강 이남이 출발지 이기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군의 전투는 사기가 중요한데 군의 사기적인 측면에서도 반란군의 상황에서 가장 취약한 것이 반란응징명분의 공격군입니다.

그럼에도 주원장의 반란군이 잘 훈련되고 정비된 고려의 원정대군(연합군) 상대로 군의 사기를 돋기 어려우며, 더구나 태원쪽으로 내려오기로한 북원군에게는 완전히 노출되어있어 주원장군이 설령 대응군을 보낸다 하더라도 소규모의 군대를 뺄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 패배는 예상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패배자명한 것입니다.

고려의 건국이념인 중원회복의 대업이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 출병한것임이 사실인데 화교란 사실을 모르고 총대장에 인끈을 준 실수, 그리고 만약을 대비한 제2군 사령관 조민수 역시 묵시적으로 동의할수밖에 없었던 군지휘계통의 문제로 인해 위화도반역은 성공하게 되었던것입니다.

 

이성계의 4대불가론이 얼마나 허구인지 알수있으며, 후일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고 정도전과 함께 요동정벌을 계획했다고 적어놓은 것은 화교임을 속이고 명분을 확보하기위한 위장술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조는 500년동안 고종때까지 명나라 왕실을 어버이나라로 모시고 자식의 도리로 극진히 제사지냈습니다.

화교가 아니고는 절대 있을 수없는 일입니다.

 

위화도 회군의 진실

 

당시, 고려군은 본군7만, 만주여진2만 그리고 기황후의 북원군 1만, 합이 10만 대군이었던 연합군이었다.

당시 주력군인 고려군은 의주에서 요동군(만주려진군)과 합류하게 되어있었고 북원군(원나라 몽고군)은 북쪽에서 직접 공격함으로서 양방향에서 협공토옥 계획되어있었는데 물론, 주력군은 고려군으로써 고려군은 당시 세계최강의 몽고군 조차도 전투력에 혀를 내두를 정도의 강군이었다.

 

고려황실의 명나라 정벌 결정이 떨어지고 총 사령관에 최영이 임명되자, 당일 밤 이성계는 아들 모두를 데리고, 최영집을 찾아가 마당에 모두 엎드린체 "명국을 정벌하지 못하면 모두 자결하겠다" 며 총대장에 임명해주길 울며 간청하였다.

길목마다 꽉꽉 모인 고려백성들의 대대적인 출병행사속에 출병한 고려 본군 7만과 의주에서 집결하기로 한 여진2만, 북경에서 합류하기로 한 북원1만 합 10만 대군이 각 영지에서 대대적으로 출병하였다.

 

그러나 이성계의 본군 7만은 위화도 부근에 이르자 갑자기 정지하였고, 이대로 2주일을 먹고 마시고 대기상태가 된다.(장마오면 회군하려는 작전이었다)

이미, 의주에 와서 본군을 기다리고 있던 금군(여진군)대장 아노후는 이러한 이상한 모습을 확인한 후, 고려황실로 파발말을 띄워 상황을 보고하였다.

전달받은 황제와 최영은 땅을 치며 이성계를 총사령관에 임명한 큰 실수를 깨닫고 최영은 즉시 황도를 출발하여 본군으로가 군을 장악하려 개성에 도착하였으나 이미 장마가 시작되고 본군은 반역군이되어 회군하고 있었다.

당시 이성계의 회군이 성공하자 명나라 주원장은 "이성계는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였다.

화교출신 이성계가 세계역사에도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든 위화도 회군을 하게되고, 그 공으로 명나라 주원장은 이성계를 이조왕으로 임명한다.

그러자 북쪽의 고려였던 만주 발해인들은 곧바로 금나라를 선포하여 신라/발해처럼 남북국시대가 되었다.

금나라는 후일 청나라를 세웠고, 이조를 징벌한 후, 결국 고토수복의 대업을 달성하였다.

 

화교후손이었던 이성계는 이렇게 대고려를 중국에 팔아먹고 스스로가 왕이 되었으며, 그 후손 고종과 고종의 종형제지간인 을사오적 이지용, 이토 히로부미와 부자의 의를 맺은 이근택등은 일본에 또 나라를 팔아먹고 비극으로 끝난 매국국가가 바로 이씨 조선왕조인것이다.

지금도 그 후손들은 친일행각을 벌이고 외제차를 몰면서, 매국행위를 일삼고 땅소송질을 하고있다.

 

 

참고사료: 청연사,이조실록등 4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