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istory

매국노 이완용과 그 후손들

이완용이 쓴 선면의 필적

당시 서예의 대가였던 이용희(李容熙)에게 서법을 익혔다.

직지사 대웅전의 편액

그의 아들인 남작 이항구가 쓴 신도비

 

 

매국노 이완용의 조카 두계 이병도

그 또한 친일 앞잡이로서 식민사관의 개이다.

 

처음 독립협회 회장까지 지낸 그가 서재필과 건립한 독립문

   

                                                          

 대역적 매국노 이완용은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 에서 이호석의 아들로 태어나 당시 권세가였던 이호준에게 양자로 입양, 고종 19년인 1882년 11월 2일 증광별시 문과에 병과 18등인 전체 28등의 성적에 입격하고 정계 진출 9년 만에 38세의 나이로 학부대신에 올랐으며 독립협회장으로 독립문을 건립하고 주미참사로 외교관이 되기도."시류에 따라 마땅한 것을 따를 뿐 달리 길이 없다"는 말을 하며 권력과 부를 쫒아 변절을 하였으며 1910년 8월 28일에 데라우치 총독과 양국 병합의 조약을 맺었다. 개 같은 인생을 살다 1926년에 죽어 마치 국장을 치루 듯 하였으며 전북 익산군 낭산면 내산동 내장마을에 묻혔다가 증손 이석형이 화장해서 없앴다.  

       

이완용의 출생지인 판교신도시 부근으로 철거되고 지금은 흔적도 없다.

 

1907년 7월 20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는데 앞장 선 내각총리 이완용

(중앙 영친왕 좌측 뒤 )  고종은 평상복을 입고 우측 옆 붉은 테두리 부근에 서서 보고 있다.

 

고종을 강제 퇴위 시키고 궁을 나오는 이등박문의 행렬

 

1910년 1월 15일 좌측부터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내무대신 임선준(任善準),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

농상공부대신 송병준(宋秉畯)

 

1899년 미국에서 찍은 그의 처

                                               

고양시 덕양구 향동동 원수골에 있는 이완용의 장남 이승구와 며느리 임걸귀의 묘자부 임걸귀는 절세미인이었는데 시부 이완용과  눈이 맞아 불륜을 저질러 아들 이승구는 자결하고 호적에서 삭제까지 당하였다고 한다.

장손은 이병길(李丙吉), 증손은 이석형, 조카는 이병도(李丙燾), 從孫子가 지금 서울대 24대 총장 이장무와 문화재 청장 이건무이다. 이병도는 원광대에 소장된 이완용의 관뚜껑을 박진길 총장에게 부탁하여 이를 소각하였다고 한다.

 

일본 왕실의 별궁을 서울에 건립토록 건의한 이완용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칼로 찔러 교수형에 처해진 이재명 의사의 모습.

이완용은 일제의 최고 의술에 의하여 목숨을 건졌다.

                    

전라도 관찰사로 체직되자 그곳의 토지들을 강제로 탈취하였다.  당시 재산이 약 600억 원의 재산가였던 그는 조선 제2의 부자였다. 

 

매국노 이완용·이병도의 손자 서울대학교 총장·문화재청장 이장무·이건무 형제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립박물관 연표는 후쇼샤 교과서판?  (0) 2009.09.25
세종의 진실  (0) 2009.09.24
역사왜곡의 시작은 조선시대  (0) 2009.09.24
한강을 왜 漢강이라고 했는가?  (0) 2009.09.24
조선왕조 500년 금서(禁書)  (0) 2009.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