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들은 고대 중국의 임금이라 하여 <삼황 오제>를 받들고 있다. 삼황 오제는 삼황 즉 태호 복희씨, 염제 신농씨, 황제헌원씨 와 오제 즉 소호금천씨, 전욱고양, 제곡고신, 요임금, 순임금 을 말한다. 이들은 중국문화, 종교의 창시자들로 이들이 동이족이라면 중국의 종교와 문화는 다름아닌 우리 민족의 신교문화로 부터 파생된 것이다. |
배달국의 5대 환웅 태우의(BC 3512)는 12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다의발은 대통을 이어 6대 환웅이 되고, 그중 막내인 태호복희는 중원으로 진출, 현 하남성의 진陳에 도읍하여 문명을 개척하였다.
복희씨는 삼신산에 올라가 제사하고, 천하에서 괘도를 얻어 천부경을 바탕으로 한 팔괘, 즉 한역을 만들었으니 이는 곧 동양 철학의 근본을 마련한 것이다. 한역은 훗일 중국 주역의 모체가 된다.
<태호복희씨 관련 문헌기록>
"역법은 사실 동이가 창시자이며, 소호 이전에 이미 발명되었다." - 중국: 서량지 교수- "환웅 천황에서 5대를 전하여 태우의 환웅이 있었다. 아들을 12명 두었는데 장자는 다의발 환웅(6대 환웅)이라 하고 막내는 태호라 하니 복희라고도 한다." -태백일사- [밀기密記]에 이르기를,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의 직을 세습하고 뒤에 청구와 낙랑을 거쳐 진으로 옮겨갔다. 그의 후예들이 풍산에서 나누어 살았으므로 풍씨로 성을 삼았다. 지금 산서성의 제수에 희족의 옛 거처가 남아 있다." "대변경에 이르기를, 복희는 신시로부터 나와 우사가 되었다. 신룡의 변화를 보고 괘도를 만들고 신시의 계해로 시작되는 역법을 갑자로 시작되는 것으로 고쳤다. 복희의 무덤은 지금 산동성 어대현 부산鳧山의 남쪽에 있다." -태백일사- |
한편 복희의 부인 혹은 누이동생이라고 하는 여와는 황토를 반죽하여 인간을 만들었다고 전하는데, 이러한 복희와 여와의 뒤를 이어 중국에서 농경와 의약의 시조로 불리고 있는 염제신농이 등장하게 된다.
염제신농은 배달국 8대 환웅 안부련(BC 3240)의 신하인 소전의 아들로서 중원의 남방으로 진출하여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게 된다. 또한 팔괘(八卦)를 겹쳐 육십사효(六十四爻)의 점(占)을 보는 점술을 고안해냈고, 저자(시장)를 세워 백성들에게 교역을 가르쳤다고 한다.
즉 그는 중국의 농업 ·의약 ·음악 ·점서(占筮) ·경제의 조신(祖神)이며, 중국문화의 원천으로 알려져 있다.
<염제신농씨 관련 문헌기록>
"웅씨에서 갈라져 나간 사람 중에 소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안부련 환웅 말기에 소전은 명을 받들어 강수에서 병사들을 감독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 신농은 여러 가지 풀을 혀로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 그는 뒤에 열산으로 옮겨갔다." - 태백일사- "신농은 열산에서 일어났는데, 열산은 열수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신농은 소전의 아들이며 소호와 함께 고씨의 방계 지류이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
황제 헌원은 치우 천왕과의 싸움에서 패한 뒤 그는 치우 천왕에게 귀의하여 청구국 고유의 천부인 3개에서 유래한 신선도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신선도는 후대의 노자와 장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도교를 일명 신선도교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 뿌리가 청구국(배달국)의 신선도에 있기 때문이다.
<황제의 반란과 치우천왕의 평정 (탁록대전)>
서기전 2707년(갑인년) 우리 민족 불세출의 대영웅 자오지 천황이 배달나라 제 14세 한웅 신시 전통을 이었다. 이 자오지 천황이 바로 치우천황(단군 14대)인 것이다. 그런데 당시 중국대륙은 셋으로 나뉘어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탁의 북쪽에 대효(大曉)가, 동쪽에는 창힐이, 그리고 서쪽에는 황제헌원(黃帝軒轅)이 있었다. 이때 황제헌원은 각각의 나라들과 동맹을 맺어 서로를 치려했으나 치우천황의 제후국들이어서 이마저 성공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때 기주(冀州)의 염제신농의 나라가 유망(楡罔)대에 이르러 정사가 과격해지더니 제후들이 서로 다투고 민심마저 흩어지며 세상이 어렵게 변해버렸다. 그러자 유망을 도와 섭정을 하던 헌원이 반란을 일으켜 판천(板泉:上谷) 벌판에서 유망을 시해하였다.
이에 치우천황은 헌원을 응징하여 유망의 원수를 갚기로 결심하여, 그 유명한 탁록대전이 시작된다. 이들과 치후천황은 70여 회의 전쟁을 했다. 그러나 치우(후)천황에게 번번이 짐으로 항복하게 되었다. 치후천황은 헌원을 쥬신의 수석 제후국왕인 황제로 임명. 살아남을 수 있는 영지를 주었다. 하지만 헌원이 황제로 임명됨으로써 중국의 영토가 중국인들의 손으로 되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
치우천황 대에 자부선생(紫府先生)이란 위대한 학자가 있었다. 그는 자부선인(紫府仙人)이라고도 하는데, 하루는 장기간 연구한 경서인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을 치우천황에게 전해 주었다.
이것은 배달국 초기에 신지씨가 발명한 녹서(鹿書)로 씌어진 연구저서로서 세 편으로 나뉘어졌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여기에 주를 달고 구분하여 신선음부경(神仙陰符經)이라 하였다. 선교와 도교의 기초가 된 저서이다.
<황제헌원에게 선도를 전파한 자부선생> 옛날에 황제黃帝가 동쪽으로 청구靑邱에 이르러 풍산風山을 지나 자부紫府 선생을 만나 뵙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았으며 이로써 만신萬神과 어울렸다. - 포박자 抱朴子 - 자부紫府 선생이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책력을 만들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궁궐에 진상하니 천왕께서 칭찬하시고 삼청궁三淸宮을 세워 그곳에 기거하게 하시니 공공共工·헌원軒轅·창힐倉詰·대요大撓의 무리가 모두 와 배웠다.- 태백일사- |
<황제헌원에 관하여> 염제신농의 아버지인 소전의 후손 지파중에 공손公孫이라고 있었는데 공손의 후손중에 황제헌원(BC 2692~2592)이 나왔다. (소전少典(염제신농의 아버지) → 공손씨公孫氏 (소전의 후손) → 황제헌원) "황제(黃帝)는 백민(白民)에서 태어나고...그는 동이東夷족에 속한 사람이다." -중국: 초사- |
삼황三皇이후의 오제五帝는 그 근원이 모두 삼황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다음과 같다.
소호금천 (BC 2598 ~ BC 2514) "창의(昌意)는 황제헌원씨의 아들로, 창의(昌意)로부터 7세가 순(舜)이다." -사마천 사기- 배달국의 고시씨高矢氏 → 소전少典(염제신농의 아버지) → 공손씨公孫氏(소전의 후손) → 황제헌원(공손씨의 후손) → 전욱고양(五帝중 한사람. 황제헌원의 손자) → 제곡고신(오제五帝 중의한사람. 황제헌원의 증손자) → 설(제곡 고신의아들; 은나라를 건국한 성탕의 선조) |
위에서 보듯이 황제헌원과 순임금이 동이東夷인이고 소호금천씨, 전욱고양, 제곡고신, 요임금 등도 모두 황제헌원씨의 자손이니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고대 임금이라 받드는 삼황오제 는 모두 동이인이라하는 것을 알수 있다.
그리고 그밖에 우리 민족이 중국에 영향을 주었던 기록들도 존재한다.
<9년 홍수때 단군께서 우임금에게 도움을 준 기록> 갑술 67년(서기전 2267)에 단군께서 태자 부루(扶婁)를 파견하여 도산(塗山)에서 우사공(虞司空: 후에 우임금)과 만나게 하였다. 태자는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방법을 전하여 주었고 경계도 따져 정했다 -단군세기- 당시 요순시대의 중국천지가 9년 간 계속된 대홍수로 인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무렵, 동방 고조선의 천자 단군성조는 105세 되시던 갑술(서기전 2267)년에 태자 부루를 중국 양자강 남방에 위치한 도산(塗山)에 보내 도산 회의를 주재하도록 하고 고조선의 제후였던 순이 특파한 우(禹)에게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비법"을 전수케 하셨다. 『吳越春秋』,『歷代神仙通鑑』 |
중국이 동이로부터 독립한 날 쌍십절. 쌍십절은 10월 10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 날 중국인들은 폭죽을 터트리며 이 날을 기린다. 그러나 이 날이 바로 중국이 쥬신으로부터 독립한 날이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관포지교(관중과 포숙)라는 한자성어를 들어 보왔을 것이다. 아주 절친한 친구 사이를 이렇게 말하곤 한다. 훗일 관중은 재상이라는 자리에 앉게 된다. 그러나 이 관중으로 인해 중국은 동이로부터 독립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중국은 비로서 쥬신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게 된다. 이 날이 바로 쌍십절인 것이다. 관중은 훗일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재상으로 기록 되어진다.
이처럼 중국인들이 자기네 조상이라고 떠받드는 반고라는 자가 이미 거발한 한웅천황이 배달국을 세울 초창기에 서쪽으로 갈라져 나간 사실이라든가,
태우의 한웅천황이 선도수련법을 체계화한 일이라든가,
치우천황이 나라의 영역을 중원의 핵심 지대로 확장했다든가 하는 업적은 우리의 기록뿐만 아니라 지나의 기록에도 뚜렷이 나와 있으므로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특히 주목되는 사실은 지나의 삼황오제 즉 태호복희, 신농씨, 황제헌원(이상 삼황), 소호, 전욱, 제곡, 요, 순(이상 다섯 제왕인 오제)이 모조리 배달족이었다는 사실은 지나의 상고사 자체가 우리 민족의 상고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역력히 입증해 주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추세는 그후 하,은,주,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진나라 대에까지 일관성 있게 지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문화를 대표하는 유교와 도교의 근원이 황제헌원이 배달국의 자부선생에게서 전수받은 삼황내문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그 당시 배달국의 문화가 얼마나 찬란했으며, 거의 일방통행식으로 동양 문화를 이끌어왔는가를 입증해 주고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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