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개경을 중심으로 서경(평양), 동경(경주), 남경(서울)이라는 대도시및 기타 중소도시를 두었습니다. 서경이라 불리는 평양은 남북국시대에 폐허가 된 도시를 고려시대에 새롭게 건설했지만 그 위세나 행정체계를 개경과 동일한 위치로 놓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고, 상당히 번성한 곳이 되었습니다.
남경의 경우 그 규모가 대봉(東), 기봉(西), 면악(北), 사리(南)를 경계로 했는데
그 면적이 조선시대 한양도성보다 훨씬 큽니다. 물론 이 구역이 모두 도시화가 된 것은 아니겠지만 남경의 경계는 남경이 가지는 위치를 말해줍니다.
남경이라는 도시는 고려의 다른 대도시들처럼 불교가 번성한 곳이었고,
개경과 서경처럼 궁궐을 둔 곳이었습니다. 풍수지리로 인해서 중요하게 취급되었고, 고려시대에 이미 여러 차례 천도를 계획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남경의 인구를 10만명 정도로 추정하는데...만약 동경도 비슷한 규모라고 한다면 개경과 평양은 이보다 크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도시들 중에서 10만명 이상이 되는 도시는무려 4개가 된다는 뜻이 됩니다-
근대 산업 혁명 이전의 고대의 도시에서 서구나 동양에서 실제 10만 이상의 도시는 세계적으로 상당히 큰 규모의 도시임을 말합니다.
고려 황궁 만월대의 복원모형은 노란 부분만이고 최근에 발굴조사하여 확인된부분이 녹색쪽 입니다.
근자에 사신이 그곳에 가서 물어보고 알았지마는, 임천각(臨川閣)에는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고, 또 청연각(淸燕閣)이 있는데 역시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 4부의 책으로 채워져 있다 한다.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유관(儒官)을 선택한 인원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으며, 횡사(黌舍 학교를 말함)를 새로 열어 태학(太學)의 월서계고(月書季考)하는 제도를 퍽 잘 지켜서 제생(諸生)의 등급을 매긴다. 위로는 조정의 관리들이 위의가 우아하고 문채가 넉넉하며, 아래로는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두셋씩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우고, 좀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군졸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 자기 고장의 글 가르치는 선생)에게 글을 배운다. 아아, 훌륭하기도 하구나!
-송나라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1123년의 내용)-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 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고려사절요 문종 12년>
왜국은 일본국이다.
본래 이름인 왜를 부끄러워 했는데, 극동에 있어서 스스로 일본이라 부른다.
지금 고려에 신하로서 속하고 있다.
-도화견문지(1080년경에 송나라의 곽약허가 지은 책)
첫번째는 고려와 당대에 있던 송나라의 수도가 있던 개봉의 도시 크기입니다.
두번째는 고려의 수도가 있던 개경의 도시 크기 입니다.
세번째는 영국의 수도가 있던 런던이며
네번째는 프랑스 파리의 중세 도시 크기입니다.
개경은 현종 이후 사찰이 성곽 바깥으로 건설됩니다.
이러한 것으로 당시 시가지가 나성 바깥으로 확장되었다고 추정합니다. 당시 파리의 시가지는 위의 지도에 보이는 성곽 내부의 점으로 표시한 부분으로 실제 시가지의 크기는 파리 성곽 내부에서도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고려의 개경은 로마제국의 로마보다 컸으며, 고려의 서경은 비잔티움제국의 콘스탄티노플보다 컸습니다. > 광통보제사
고려시대 경성이었던 개경의 한복판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으니
바로 광통보제사입니다. 이 사원은 얼마나 거대했는지 당사唐寺 혹은 대사大寺
로 불리었다고 합니다. 워낙 많이 소개된 사찰이라 잘 아시겠지만 보제사에는
건물이 1천여채나 되었으며 절 안에는 세개의 연못과 아홉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무엇보다 유명했던 것은 5층 목탑으로서는 5손가락 안에 들어갈법한 높이라는
연복사 5층 목탑이 있었는데, 높이가 무려 60미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송나라의 문신이었던 서긍은 이 보제사의 나한보전을 보고서 왕의
거처를 능가한다고 말했습니다. 게다가 승당과 법당은 100명의 인원을
수용할만하다고 했으니 이 광통보제사가 얼마나 거대한 사찰이었는지를
손쉽게 알 수 있습니다.
<고려의 엄청난 규모의 사찰들과 문화재 사진들>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고려통치자의 황제칭호에 대한 금석문 종합>
임금(皇)께서 피석하여 공경을 다하였고..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965년)
황제폐하(皇帝陛下)께서 조칙을 내려 이르기를..우리 황제폐하(皇帝陛下)께서도 지극하신 정의로..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975년)
금상황제(今上皇帝)의 만세를 기원합니다.
태평2년명마애약사불좌상(977년)
봉황(鳳皇)의 은혜를 입었으며..
연곡사현각선사탑비(979년)
임금(皇)께서는 이에 크게 감동하고..황유(皇猷)입음을 경축하여..
지곡사진관선사비(981년)
광종대왕(光宗大王)이 황(皇)위에 올랐다.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1025년)
엎드려 황제폐하(皇帝陛下)의 덕이 하늘과 땅에 떨치고..
보현사석탑(1044년)
황상(皇上)께서 결(訣) 패일(佩日)..
부석사원융국사비(1053년)
황상(皇上)께서 천조(踐祚)에 오르시던 병술년 봄 정월에 이르러..
칠장사혜소국사비(1060년)
성황(聖皇)께서 국척 원신을 지극하게 기리는 것이다.
이자연묘지명(1061년)
무릇 우리 황(皇)의 아들들은 모두 공의 생질이 되니...태자(儲皇)와 후비, 친왕 등에 이르러서는..
이정묘지명(1077년)
공이 황후(皇后)의 인척이므로 더욱 총애하여..황후(皇后)가 안에서 공을 불러..
최계방묘지명(1117년)
5남 응추는 황자(皇子)인 극세승통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이식묘지명(1156년)
태자(儲皇) 역시 그 아름답고 고움을 슬피 여겨 특별히 제물을 내리고 각별히 총애하는 뜻을 보였다.
왕영녀왕씨묘지명(1186년)
때는 황상(皇上)께서 즉위하신 원년 모월 모일이다.
개천사석탑(1214년)
황태제(皇太弟)가 바로 신종(神宗)이다.
최충헌묘지명(1219년)
[거란의] 천자는 공이 우리 임금(皇)의 친족이고..
최의묘지명(1223년)
중성(中城)을 [?]해서 황도(皇都)의 울타리로 삼았다.
최항묘지명(1257년)
------------------------------------------------------------------------------
'고려국황제가 첩장을 헌상했다고 대재수가 전했습니다.'
미나모토노 토시후사의 '수좌기 승력 4년(1080년)'
권지고려국사 왕순(현종)이 고주사 윤증고 및 여진장군 대천범 이하 무릇 78인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순이 표하여 말하기를
"거란이 도로를 막아 오랫동안 통하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황제 존호와 정삭을 내려주십시요" 조하여 청을 따랐다.
속자치통감 대중상부 7년(1014년)
대금황제(大金皇帝)가 고려국황제(高麗國皇帝)에게 글을 부친다
제왕운기(1287년)
위에는 고려의 금석문, 밑에는 다른 나라와 관련된 자료입니다.
<고려의 문화가 가지는 세계적인 문화의 정수는 건축물 뿐 아니라 신라 이후의 목탑, 석탑외에도 의복,고려 불화에서 나오듯 회화에서도 극치의 미의 경계를 구현한 나라입니다.
또한 당대 세계에서 유일하게 도자기를 만들수 있었던 나라가 송과 고려 였지만 송나라의 자기는 불투명 유약과 정교한 불조절을 못해서 다양한 무늬를 만들지 못했는데 비해 고려는 투명한 유약과 졍교한 불조절등으로 이미 다양한 무늬와 예술적인 조형을 통해 세계 최고의 고려청자와 자기를 만들어 내며 생활화 하였고 송, 왜국, 동남아의 필리핀 태국, 중동 인도까지 교류합니다.
그리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및 팔만대장경 같은 발달한 기록,인쇄문화와 일찍히 삼국시대부터 이어져온 서민들에게도 교육을 실현 시킬 정도로 세계사에서도 매우 보기 드문 선진 교육체계를 유지, 발전시킨 사회입니다.
기타 고려의 사회는 매우 다양한 사상인 당시의 유,불,선및 풍수지리등이 함께 공존하며 중앙의 귀족문화뿐 아니라 지방의 호족 문화도 함께 발전한 다원적이며, 세계적 나라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군사면에서 서긍의 고려 도경에서도 밝히듯 중앙의 2,30만과 지방의 광군이라는 30여만명으로 총동원이 가능한 60만의 대군을 보유한 세계적 군사강대국으로 이후 전사적 북방의 패자였던 대국 요나라와의 10여차례의 전쟁 및 3차 대전을 다 승리하여 동아시의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문화의 시작 고대 중국 임금들은 동이족 (0) | 2010.03.20 |
---|---|
무당파의 시조 장삼풍 (2) | 2010.03.20 |
고려사찰 (0) | 2010.03.20 |
고려 불화의 아름다움 (0) | 2010.03.20 |
'음양(陰陽)사상'은 한국 고유의 것 (0) | 2010.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