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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5.18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증언1에 나오는 안창식 인민군 대위

 

대한민국 현대사 중 반드시 바르게 재정립되어야 할 1980년 5.18 무장폭동의 배후에 主敵이자 민족의 共敵인 김일성(김성주) 김정일의 인민군 특수부대가 침투했다는 탈북인들의 증언록인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는 전라남도 목포를 깃점으로 하여 전남일대에는 친북정서가 아주 잘 발달해 있었다는 증언들이 있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증언 1에 나오는 안창식 인민군 대위

침투한 목포,광주를 중심으로 "그들의 조직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같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질적으로 째여(짜여)있는 북한의 당조직과도 별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체계적인 조직구성과 집단화된 규율을 가지고 있었고 정신적인 무장상태나 각오 정도에서는 북한의 조선노동당원들 수준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지휘부 형태로 사용하는 공간에도 김일성의 초상화는 물론 김정일의 초상화까지 걸려 있었고 김일성 선집이라든가 김정일의 주체철학 등 북한에서나 볼 수 있는 사회주의 내용의 북한용 정치서적들이 대거 비치되어 있어 마치도 북한 땅에 있는 어느 박사의 사무실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 자본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들이 어떻게 돼서 북한사람들의 정신 상태 이상으로 김일성, 김정일을 숭배하고 북한 체제를 위해 주저 없는 희생을 감수하고 나서는 지 한 순간의 머리판단으로써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증언 2 '평양사자'로 불린 장중한이 쓴 기록 중

"남조선의 전라남도 광주는 해방 전부터 인민들의 애국심과 혁명적인 열기가 다른 곳에 비해서 특별했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의식도 대단히 강하다는 것을 5.18이 시작되기 전부터 첫눈에 알 수 있었다.그들의 머릿속에 잠재해 있는 혁명적인 사고방식은 5.18 사건이 시작될수 있는 충분한 원천이었고 원동력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6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은 광주사건이 시작된 하루 뒤인 1980년 5월 19일 새벽에 광주시내로 침투하였다고 한다...대학가와 청년학생들의 지도부세력을 우선장악하고 그들에게 무기를 공급하여 비무장시위의 형태를 폭력적인 무장폭동으로 격상시키는 것이었다. 광주폭동기간 광주지역뿐 아니라 전라도의 전 지역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무기고습격사건들은....』

이 북한 자료 역시 5월 19일 나주에서의 시민군의 최초 무기 탈취 사건의 산증인 김동문 기자의 증언과 짝이 맞는바, 그는 지난 해에 27년간 고이 간직했던 낡은 취재 수첩을 수기 형식으로 공개하면서 북한군 개입 의혹을 5월 19일 당일부터 품었음을 발표하였다. 푸른 눈의 목격자 힌츠페터가 5월 20일 찍은 아래 사진은 5월 20일 나주, 화순, 영암 등 광주 외곽 지역에서 광주로 향하고 있었던 5.18무장단체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진은 광주시민군이 5월 19일부터 이미 무장하고 있었다는 김동문 기자의 증언을 분명하게 뒷받침하여 준다.

자, 여기 어째서 북한 자료는 목포라는 지명을 언급하는지의 문제가 있다. 광주사태에 대한 증언인데, 목포에서 있었던 사건들, 목포를 경유하여 북한군 부대가 광주로 침투한 사실 등이 언급되어 있다.

독자들에게 다소 황당하게 느껴지리라. 그러나 남한 자료에도 처음에는 황당하게 받아들여지는 증언들이 있다. 외부 무장단체가(혹은 가짜 연고생 300 명이) 목포를 경유 광주에 침투하여 시민군을 지원해 줄 것이라는 선무 방송을 전옥주 본인의 입으로 하였다. 그러나 자기 입으로 방송해 놓고도 그녀는 수년이 지난 후에도 황당하게 여기고 있다. 그 스토리는 이러하다.

탈북군인들이 300 명씩 두 떼로 북한군이 광주로 침투하였다고 증언하였을 때 일각의 반응은 과연 300 명씩 두 떼거리가 광주로 침투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겠느냐였다. 여기서 300명이란 숫자가 중요한 것인데, 놀랍게도 5.18측 자료들이 300명씩 두 떼거리의 외부 무장단체가 광주로 침투한 사실이 있음을 입증해 준다.

연고생이 300 명씩 두 떼거리로 광주로 침투한다는 소문이 시민군들 사이에 파다했다. 그런데, 그 많은 연고생이 광주시민군에 입대할 목적으로 침투한 사실이 전혀 없다. 즉, 연고생 300 명은 위장명칭이요, 실제로는 외부 불순세력 300 명이었다. 전옥주는 광주사태의 핵심인물이다. 그녀의 선무방송만 없었어도 광주사태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 하지 않는가. 광주사태 기간 내내 무수한 선무방송을 했던 그녀가 8년후 기억한 것은 연고생 300 명 침투설 뿐이었다.

 

착각은 자유가 아니다.

1980년 5월 18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일어났던 무장폭력사태 이후 29년이라는 참으로 많은 시간과 세월이 흘렀고 이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아득한 옛말이 되어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있다.

특히 지금은 젊은 층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는 1980년 이후의 세대들은 5.18 사태에 대해서 단순히 민주화에 기여한 역사적 사건이라는 개념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 사태의 실체와 그 배후에 보이지 않게 가려져 있었던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전혀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죽인자와 죽임을 당한 자, 저주할 자와 저주받을 자가 정확히 걸러지고 선별되지 못한 채 이 사건은 사태의 본질에서 멀리 벗어난 민주화운동으로 인식되어 '민주화의 성역' 으로 굳어져가고 있다.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바뀐 사연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정치작품이라는 의심이 짙게 간다. 절차가 정상적이지 않았던 측면이 있었고,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인물들의 정치적 타협과 절충 과정에서 본말이 완전히 전도 되었다는 느낌을 충분히 가지게 하는 측면이 있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김영삼 정부가 5.18 광주사태 전반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과학적인 근거를 전제로 해서 이 사건을 정당하게 민주화 항쟁이라고 새롭게 정정한 것이 아니라 김대중 세력과의 변칙적인 타협과 제휴, 모종의 커넥션을 바탕으로 5.18 광주무장폭력사태에 분칠을 하였고 '민주화의 옷' 을 입혀주었다고 할 수있다.

광주사태는 국가의 정체성과 현안에 직결되어 있는 매우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이다. 때문에 정확한 근거가 없이 민주화다, 민주화가 아니다, 라고 함부로 입에 올리고 맘대로 가공하는 것은 철저한 금물이고 반드시 경계해야 될 부분이다.

5.18 광주사태가 정당한 논리에서의 민주화이고 약자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방어 차원에서 강자의 폭력에 맞서 일어난, 순수한 민의에 의한 선의의 항쟁이었다면 북한 사람뿐 아니라 어느 누구의 입장에서도 군소리 없이 민주화가 분명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민주화 항쟁으로 불러지고 있는 5.18 광주사태의 전반은 민주화라는 내용과 거리가 멀 뿐만 아니고 그 성격 자체가 국가적 차원에서 매우 위험한 요소를 가지고 있던 사건이다.

국가 이익에 반하는 소수친북세력들의 비정상적인, 민주화 놀음에 제동이 걸려서 5,18의 본질을 놓치게 되면 국가의 정체성을 놓치게 되고 국가의 정체성이 사각지대에 놓이면 국민들은 헤어 나오기 힘든 함정으로 빠져드는 위험한 결과가 멀지 않은 시기에 반드시 현실로 찾아 온다는 것을 더 늦기전에 깨달아야 한다.

과거시대가 남겨놓은 모든 일은 단지 시간 문제일 뿐이지 어떤 형태로든 잘잘못을 떠나서 그 시대가 남긴 것 만큼 내용과 사안에 따라서 새로운 시대와 후대가 다는 저울 추위에 올라서게 되어있고 또한 계산을 받는 것이 법칙이요 맘대로 비켜가지도 피하지도 못하게 되어있다.

수많은 과거사 중에서 5.18이 가장 중요한 재평가 대상으로 지목되어야하는 이유는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노무현의 친북정권 10년은 남한의 정치권뿐만이 아니라 전체 사회가 북한의 인질로 전락하게 하는 길을 틔웠고 수많은 친북 군단을 양산하여 북한에 대한 저항력을 무력화 시켰으며, 다수의 간첩을 비롯한 대한민국 파괴세력들을 '민주인사', '혁명열사'로 만드는 일에서 일대 성공을 이룩하였다.

착각은 자유지만 착각을 잘못하면 무덤행이다. 김정일 정권이 도발적으로 핵을 만들고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이유를, 햇볕이 부족한 결과에서 초래된 일이라고 진단하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지체 없이 포기해야 되고 국가 정체성 자체도 바뀌어야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죽음의 문턱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죽음이 주는 공포가 얼마나 가혹하고 절망적인지 전혀 모르고 무개념 이듯이, 북한의 밑바닥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김정일 정권이 남한체제를 전복하기 위해서 파놓은 함정이 얼마나 깊고 함부로 헤어 나올 수 없는 터널인지 절대로 가늠할 수가 없다.

 

5.18광주사태의 본질은 좌우의 논리가 아니다.

북한체제를 빠져나온 탈북자들이 대한민국 사회에 첫발을 들여놓으면서 본의 아니게 잘못 생각하는 부분이 딱 두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남한은 북한과는 달리 자본주의사회이기 때문에 별로 힘들이지 않고 배불리 먹고 잘살 수 있다고 단순하고 쉽게 생각하는 부분이고 두 번째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무조건 탈북자들의 편이고 탈북자들의 주의 주장은 그대로 북한을 이해하는데서 교과서가 된다고 믿는 것이다.

판단의 착오지만 정작 현실에 부딪치면서 탈북자들 대다수는 두 가지 문제중에 한 가지에 대해서는 답을 내지만 다른 한가지에 대해서는 답을 내지 못한다. 먹고사는 문제는 북한과 달리 남한사회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고 개인이 자기를 책임질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본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바로 수습을 하게 된다,

그러나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어떤 이유로 남한사회에 존재하고 그들이 무엇 때문에 김정일 정권에 동조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경시하고 부정하는지,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관과 정체성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 쉽게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정권 이후에 남한으로 내려오는 탈북자들은 대한민국 사회 내부에 비국가적인 잡초세력(친북세력)이 있다는 것을 북한에서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오지만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구성요소가 친북에 무저항적이라는데 대해서 까지는 전혀 개념이 없이 오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으로 온 탈북자가 2만 명 밑을 배회하고, 그들 개개인의 성향 또한 갈리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남한사회를 보고 진단하는 눈이 모두가 하나같다고는 결코 생각지 않지만 전반적인 탈북자들이 보는 대한민국 정체성에 대한 견해는 동일하게 경악할만한 수준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수 있다.

좌와 우라는 논리가 국가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전제로 하는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측면에서의 건전한 논리와 개념이 아니라 나라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극단적인 친북, 반북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국가를 분열시키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고 또한 여기에 북한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탈북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혼돈하는 결정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출판하는 근본적인 목적과 취지는 5.18사건이 본래의 사실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왜곡되어 남한내부의 좌우의 이념대립과 간극분열을 조장하는 원인제공의 정점에 있기 때문이다.

5.18광주사태를 원점에서 재평가함에 있어서 문제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심중하게 접근해야 되는 것도 물론 중요한 사안이지만 대한민국사회가 초당적으로 경계해야 될 몇 가지 부분들이 있다.
먼저 5.18광주사태의 전반사항에서 제기된 문제점을 가지고 좌와 우를 거론하며 가치관과 정체성을 걸고 대립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나 유해하고 백해무익한 일이라고 진단해야 한다.

광주사태의 깊이를 한 꺼풀씩 벗기면서 들여다보면 두 진영이 이념문제에 사활을 걸고 싸워야 할 하등의 이유가 전혀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재되어 있는 사건의 성격에서 좌우가 목숨을 걸어야 할 빌미 같은 것도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좌파의 정체성은 친북으로 변질되었다

 

2005년12월7일, 남한에 내려온 북한특수부대출신들은 서울 정동세실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자유북한군인연합'을 결성하였으며, 북한의 독재자 김정일에게 본연합의 명의로 된 공개서한을 보낸바 있다.

공개서한의 기본내용은 북한에 있는 정치범수용소를 해체하고 죄 없이 갇혀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무조건 석방하며 북한인민들이 인간으로써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자유를 줘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이와 같은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독재체제의 연장을 위해서 인민들을 탄압하고 자유를 계속 억압한다면 탈북군인출신들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북한정권에 대한 정면대응도 불사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1년 뒤인 2006년12월20일, 같은 장소에서 1980년5월18일 일어난 광주사태에 북한군특수부대요원들이 대거 침투하여 남한정권전복을 위한 배후교란 작전을 진행하였다는 내용을 가지고 다시 한 번 기자회견을 진행하였다.

자유북한군인연합이 기자회견을 하기 이전부터 남한에 먼저 온 부분적인 탈북자들을 통해서 5.18광주사태 당시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요원들의 실체가 있었다는 증언이 조금씩 제기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군 특전사출신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광주사태와 관련해서 문제제기를 하고 기자회견을 하기는 당시가 처음이었고 또한 세간이 놀랄만한 이슈라고도 할 수 있었다.

2006년12월20일. 자유북한군인연합이 당시의 친북좌파정권(노무현정권)임에도 그들을 의식하지 않고 열악하고 불리한 배경 속에서 5.18광주사태와 관련해서 기자회견을 한 목적은 크게 세 가지였다.

북한에서 회자되는 5.18광주사태에 대한 내용과는 정 반대로 남한에서는 당시의 무장폭력사건이 터무니없는 민주화로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 놀라웠을 뿐만이 아니라 이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데 우선목적이 있었고, 북한에 우호적인 친북세력들이 '광주민주화항쟁'이라는 날치기 명분을 도용해서 좌·우의 간극과 대립을 조작하고 대한민국사회를 공개적으로 분열시키는 것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데 또 다른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마지막 하나는 이 문제가 남한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좌·우에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누구의 눈치를 볼일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자유북한군인연합은 5.18광주사태에 대한 기자회견을 여는 취지에 대해서 위의 목적과 같은 사실을 전제로 한다고 밝혔으며 탈북군인출신들은 북한에서부터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말한다는 것을 분명히 강조하였고, 참고로 북한에서 말하고 있는 사실과는 별도로 남한내부에도 광주사태와 관련해서 풀리지 않고 있는 미제의 문제들이 많이 산적해 있고, 이를 둘러싼 각이한 여론이 형성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반드시 재확인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데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였다.

또한 5.18광주사태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좌 · 우가 냉각되는 상황을 조성하고 국가적인 분열과 내홍이 초래되는 결과를 만들지 말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밝히고 해명해서 국가의 정체성을 재정비하고 국민들을 단합시키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제3자의 입장에서 강력히 주문하였다.

5.18광주사태의 본론으로 들어가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좌파세력이나 우파세력이 다 같이 북한의 김정일 정권에 의한 동일한 피해자라는 것이 자유북한군인연합과 탈북자들 전반의 견해이고 일관된 입장이었다.

현재도 광주사태에 대한 탈북군인출신들과 일반탈북자들의 입장은 2006년 기자회견 당시와 조금도 다를 바 없지만 이 사건을 가지고 현 시점에서, 그리고 대한민국국민들 앞에서 다시 한 번 재차 강조한다면 5.18광주사태를 논함에 있어서 이를 좌·우의 논리로 취급하고 쟁점화 시키는 것은 본질을 놓치고 혼란을 자초하는 행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다.

친북의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세력들이 5.18광주사태를 의도적으로 정치적 목적과 기득권놀음에 이용하고 있는 것이 답답하고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분명하게 북한의 개입으로 혼란이 조성되고 내부가 교란된 사건이었던 만큼 좌 · 우가 극단적으로 대립하면서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하기 전에 냉정을 되찾고 국가적인 중대사라는 책임적인 입장에서 원칙과 정도가 어느 쪽인지 판단을 정확히 해야 한다.

금세기 한반도의 정치정세와 안보환경을 고려할 때 좌·우의 투쟁개념과 내부의 분열은 사실상 자살행위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2006년12월 광주사태 기자회견 당시 남한에서 좌·우의 문제가 생각이상으로 이념문제를 동반하고, 심각한 정체성문제로까지 대두되면서 대립을 야기하는 위험수위에까지 근접해 있고, 쉽게 풀리지 않을 정도로 매우 골이 깊다는데 대해서 어렵지 않게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다.

그 예가 먼저 1980년5.18광주사태 당시 북한군특수부대요원들이 개입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에 대한 친북세력들과 5.18관련 단체들의 반응이다.

2006년12월20일, 자유북한군인연합의 광주사태 기자회견에 대해서 5.18관련단체들은 긴급성명을 내고 5.18광주사태는 법적으로 인정된 민주화항쟁이라고 본 연합의 기자회견취지와 맞지 않는 반박을 했던 일이 있다. 또한 이들은 자유북한군인연합이 광주사태에 북한에서 파견된 군 특수부대요원들이 침투하여 배후교란작전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역사를 정면에서 부정하는 것으로써 한국사회를 파괴하기 위한 불순한 행동이라고 이상한 '죄명'을 씌우기도 하였다.

자유북한군인연합은 기자회견에서 5.18광주사태를 민주화의 논리에서 무조건 배제시켜야 할 사건이라고 매도한 적이 없었으며 다만 북한정권과 내조한 남한의 불순세력들이 평화적인 시위를 교란해서 와해와 이간을 조성하고, 무장폭력으로 국가전복을 기도하는 과정에서 사태의 본질을 모르는 무고한 사람들이 인질이 되여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주장한 것이 전부였다.

자유북한군인연합은 5.18관련단체 측의 반박성명에 대해서 단순한 감정이나 억지놀음으로 대응하지 않고 한동안 시간을 가지고 대안을 연구하였고, 5.18단체 측에 광주사태 당시에 현장에서 발생한 사건들 가운데 망월동묘역의 신원미상 자 문제, 시민군의 교도소습격문제, 많은 사람들이 당시 진압군이 들고 있던 M16이 아니라 시민군이 가지고 있던 칼빈 총에 의해서, 그것도 정면이 아니라 등 뒤쪽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총알을 맞아 사망한 이유 등 현재까지 해명되지 않고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미확인 문제들에 대해서 국민들 앞에서 소상하고 논리적으로 해명하고 그 이후에 자유북한군인연합 측의 주장에 대해서 반박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기자회견당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던 5.18관련단체들은 자유북한군인연합이 제기한 질문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답변을 못했으며 현재까지도 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나 해명이 없이 일언반구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있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대답여부에 대해서는 정상적이든 비정상적이든 본인들의 입장과 의사에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에 5.18단체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크게 나무라고 신경 쓸 필요가 없지만 다만 우리가 여기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중요하게 다른 부분에 있다.

광주사태 발생 당시에 저질러진 무고한 인명학살의 당사자가 5.18세력들이 목에 힘을 주고 말하는 것처럼 남한의 국군이 아니라 북한정권의 지령을 받고 광주사건현장에 침투되었던 북한특수부대요원들의 소행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5.18관련당사자들이 부정할 근거가 전혀 없음에도 무슨 속 궁 냥이 있어서 반박할 근거를 단 한 가지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애써 부인하고 막으려고 하느냐 하는 것이다.

5.18광주사태의 전반적인 상황을 분석하면 민주화를 위한 항쟁이라는 측면에 긍정이 가고 힘이 실리기보다 무장폭동으로 국가전복을 노렸다는 부분에 의심의 눈길이 먼저가게 되어있고, 무참하게 도륙당하고 사망한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누구의 손에 의해서 눈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지독하고 끔찍한 참변을 당했는지에 대해서 의혹이 증폭되는 것이 사실이다.

진실이 밝혀져야 할 부분들과 정리되어야 할 중점적인 사안들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저들끼리 다 덮어버리고 무턱대고 민주화라는 측면만 부각시키는 것은 모종의 의혹과 연결된 측면이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도 객관성을 상실하는 대목이라고 결론할 수 있다.

민주화항쟁이라고 주장하고 남들도 그렇게 믿게 하려면 사건의 본질에 대해서 이의가 제기되기 전에 민주화라고 주장하는 5.18관련당사자들이 먼저 본인들의 주장이 합리적이고 정당하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

예를 들면 방산 업체를 일거에 습격해서 수백 대의 트럭을 장악하고 시민군의 능력밖에 있는 장갑차까지 탈취하여 고도의 기술수단으로 진압군을 깔아죽이게 된 경위라든가, 탈취한 수백 대의 트럭을 기동수단으로 이용해서 일반인들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보안절차에 있던 전라도지역의 무기고 수십 개를 동시다발적으로 들이치고 시민군이 무장을 하게 된 과정, 이들 무기고소재들에 대한 정보를 어디서 얻었으며 무장폭동이 최후의 결과로 노린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숨기지 말고 그대로 실토해야 한다.

또한 이미 전에도 5.18단체들한테 질문한바 있는 내용이지만 민주화가 목적이었던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교도소에 대한 습격을 여섯 차례나 시도했으며 죄수들을 구출해서 어떤 목적에, 어떤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했었는지에 대해서도 다른 구차한 변명을 하지 말고 사실대로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특히 광주사태를 논함에 있어서 그 와중에서 가장 민감한 사안이라 할 수 있는 일반시민들에 대한 지독한 학살의 문제를 비켜갈 수 없다.

자극성과 선정성에서 배가의 효과를 가지는 여성들을 목표로 옷을 벗기고 유방을 도려내고 머리와 팔을 잘라서 폭동의 '흥행'을 유도한 당사자가 어떤 무리인지, 그 주인공이 대한민국국군인지 아니면 제3자의 소행인지 사실대로 밝혀서 공개하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다.

의혹이 중심에서 풀리지 않고 있는 중점적인 내용들을 교묘하게 은폐하고 어느 누가 봐도 순수한 민주화라고 인정할 수 없는 사안에 민주화라는 타이틀을 붙여서 공권력과 진압군을 학살자로 몰아붙이는 것은 원칙과 정도에서의 탈선이 아니라 지극히 비정상적이고 용납될 수 없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명명백백히 북한의 김정일 정권과 함께 남한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대중과 같은 반국가적인 주동세력들과 따지고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사건이 분명함에도 도둑이 매를 드는 격으로 정상적인 공권력과 국군에게 터무니없는 살인자의 감투를 씌우고 죄를 묻는 것은 국가를 무장해제 시키고 파괴하려는 행위로 밖에 풀이되지 않는다.

5.18광주사태의 진실을 따지는데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민주화라는 부분보다 어떤 의도와 목적에 의해서 선량한 민주화시위가 무장폭동으로 변질되었고 순수하고 죄 없는 무고한 생명들이 누구의 '작품'에 의해서 군중을 자극하고 선동하는 제물이 되여 잔인하게 학살당했는가 하는 것이다.

또한 이 사건이 만들어내고 있는 후유증, 다시 말해서 1980년5월18일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의거'가 나라의 민주주의 발전과 정체성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30년이 다되어 가는 오늘에 와서까지도 국론분열의 중심에서 국가의 정체성과 안보를 흔들고 남남갈등을 조장하는, 독성이 강한 말기 암 덩어리로 존재하고 있는 가를 해부하는 것이 '이상한 민주화'의 논리를 운운하기에 앞서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라 할 수 있다.

5.18관련세력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광주의 '민주주의 항쟁'이 당위성과 객관성차원에서 정당하게 민주화로 인정받으려면 어두운 베일에 가려져서 현재까지 바깥구경을 못하고 깊숙이 묻혀 있는 내용들이 한 점의 의혹도 없이 투명하게 밝혀져야 한다.

광주사태의 진실을 재조명하고 엄격하고 공정하게 평가하는 문제는 5.18관련세력들의 '업적'을 짓밟고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탄압하는 행위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도를 바로잡고 국가를 정상의 궤도에 세우는 사업이다. 이는 또한 5.18관련세력들에게 여유를 주고 방치해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한민국국민들이 주인이 되어 좌우를 의식하지 말고 책임적인자세에서 시급히 풀어야 하는 당면한 숙제라고도 할 수 있다.


<자유북한군인연합회(대표 임천용)발행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머릿글에서>

 

잠수함에서 하선하여 남쪽의 안내원을 따라...

탈북군인들의 증언록인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이 최근에 출간되었는바, 광주사태 때 남파되어 무기고 무기 탈취 등을 주도하였던 북한군의 연인이자 사실상의 부부관계였던 여성의 증언도 수록되어 있다. 그녀의 증언 중 목포를 경유하여 광주에 침투한 북한군 관련 몇가지 핵심 요점을 추리면 아래와 같다:

『잠수함에서 하선하여 남쪽의 안내원을 따라 도착한 곳은 남조선의 전라도지역인 목포라는 해안가 도시의 작은 상점가계 안방이었다』

『그들이 당시 임무내용을 전달받으면서 한순간에 파악했던 것은 조만간 남조선에서 4.19인민봉기를 능가하는 전국적인 대규모의 인민항쟁이 무장폭동의 성격으로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으며 자신들이 목포지역으로 급파된 것도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목포에 침투하였던 11명의 요원들이 사북탄광사태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일은 없었다고 했지만 그들의 말로는 그곳에도 북한의 계획적인 지령을 받고 파견된 별도의 특수부대요원들이 잠입하여 사북사태가 강원도지역 전반으로 확산되도록 배후를 은밀히 조종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여기서 놀랄만한 것은 목포를 중심으로 광주폭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5개월 여 동안 목포,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숨은 지하조직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침투 조 인원들이 직접 목격한 일이지만 그들의 조직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같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지휘부형태로 사용하는 공간에도 김일성의 초상화는 물론 김정일의 초상화까지 걸려있었고 김일성선집이라든가 김정일의 주체철학 등 북한에서나 볼 수 있는 사회주의 내용의 북한용 정치서적들이 대거 비치되어 있어 마치도 북한 땅에 있는 어느 박사의 사무실을 보는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당사자들한테서 직접들은 이야기지만 북한은 5.18사건을 배후에서 계획하면서 철저하게 두 가지 목적을 노렸다고 한다. 하나는 남조선사회를 북한체제가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국가전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전라도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믿음직하고 충실한 친북정권수립이었다.』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과 부마사태에 참가했던 7명의 요원들이 합류된 18명의 소부대는 광주사태의 전 과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목포에 거점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북한과 수시로 교신하면서 광주작전과 관련된 필요한 지시들을 지령 받고 집행하였다. 광주폭동이 진압군의 작전으로 종료될 때까지 두 명의 인원은 고정적으로 목포아지트에 대기하면서 광주시내에서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신속하게 지휘부에 보고했다.』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6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은 광주사건이 시작된 하루 뒤인 1980년 5월 19일 새벽에 광주시내로 침투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광주에서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임무는 전라도 내에 잠재해 있는 지하조직들을 간접적으로 동원해서 반정부시위에 참가하고 있는 대학가와 청년학생들의 지도부세력을 우선장악하고 그들에게 무기를 공급하여 비무장시위의 형태를 폭력적인 무장폭동으로 격상시키는 것이었다.

광주폭동기간 광주지역뿐 아니라 전라도의 전 지역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무기고습격사건들은 그들이 사전에 일일이 파악한 정보를 토대로 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북한군 잠수함타고 침투

 

영화 "화려한 휴가"는 어떤 정치 프로파겐다의 목적으로 제작되었겠으나, 일면 오히려 5.18측에 치명타를 끼치는 역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광주사태 당시 우리는 시민군의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광주사태를 처음부터 줄곧 TV로 지켜보고 있었던 북한 주민들과 달리 우리에게는 무장시민군의 모습을 사진으로조차 볼 기회가 없었다.

영화는 시민군이라 불리는 무장단체를 미화시킬 목적으로 제작되었지만, 이 영화는 시민군의 모습을 천분의 일이나마 공개하고 말았다. 비록 모든 치부를 감추고, 최대로 미화시켜 천분의 일을 공개하였지만, 그 천분의 일은 국민이 전혀 시민군의 모습을 모르고 있었던 때와 전혀 다른 변화를 몰고 왔다. 2003년부터 공개되기 시작한 인터넷 자료들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국민은 시민군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이제 알게 된 것이다.

과연 "시민군이 시민에게 총을 쏘았을까?" 오랫동안 우리는 이것을 과장된 표현이려니 여겼었다. 그러나 시민군 증언록이 펼쳐지는 순간 그 사실이 확인되었다. 1988년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격상시킬 목적으로 5.18 단체들이 채증한 증언록에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였다며 그 사실이 밝혀져 있다. 그리고, 2006년부터 시작된 탈북군인들의 증언이 그 사실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가 국민에게 보여주지 않는 시민군의 치부 중의 하나이다. 군복 입은 장발족 광주시민군이 시민들을 향하여 총구를 겨누고 있다. 총의 모양새도 특이하며, 곤봉을 들고 있는 시민군 모습도 보인다. 만약 저 곤봉으로 누군가를 때렸다면 어째서 타박상 입은 시민들이 있었는지 설명된다.

그리고 이마에 흰띠를 둘렀음이 눈에 띈다. 그런데 바로 하루만에 광주에서 시민군이 창군되고, 온갖 군사 장비들로 무장하며, 조직적으로 편성되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 순발적인 기동력은 현역에게도 불가능하다. 탈북자들의 5.18증언록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가 바로 이런 난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이 책의 증언1(45~92쪽)에서 전 함경남도 금야군 고등중학교 교원은 10.26 대통령 시해사건 직후인 1979년 11월 중순부터 북한은 광주사태(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킬 준비를 남한 내 좌익세력과 공동으로 진행하였다고 증언한다. 과연 이 핵폭탄적인 증언이 사실일 수 있는가? 그런데, 그녀의 증언 내용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그녀는 남한 정보를 몰랐으며, 우리는 북한 정보를 몰랐다. 그럼에도 쌍방간에 역사적, 객관적 사실들이 일치한다면 그 증언의 진실성은 입증된다.

그녀는 "북한의 계획대로라면 원래 광주폭동이 정상적으로 시작되어야 하는 날자는 1980년 3월경이었다고 한다"고 증언한다 (77쪽). 이 증언은 3/23 새벽 서울 한강 하류 무장간첩 3명 침투, 3/25 새벽 포항 앞바다 무장간첩 출몰, 27일 새벽 김화지구 간첩침투 등을 보도하는 아래의 뉴스 동영상과 그 사건 전개가 부합한다.

아마 그녀의 독자들은 예상을 넘는 그녀의 증언에 조금은 당황해 할 것이다. 북한군 침투설의 난제는 북한군이 어떤 방법으로 침투할 수 있었겠느냐였다. 그리고 북한군이 잠수함 타고 침투하였으리라고는 전혀 우리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었기에 많은 독자들이 반신반의해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명확히 입증해 주는 다큐 영화 동영상이 바로 아래에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1996년 여론몰이로 5.18재판을 진행하기 위함이었는지 국민에게 알리지 않았으나, 그의 간담을 서늘케 한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무장공비들이 잠수함 타고 침투한 사건이었다. 5.18재판 여론몰이에 묻혀 국민에게는 잘 보도되지 않았으나, 북한군 14명과 싸우기 위해 우리 편에서는 십만 배가 넘는 무려 150만명이 동원되어 장장 51 일간 걸린 대간첩 작전이 있었다. 위 동영상을 보면 북한군이 광주사태를 일으키기 6개월 전 잠수함 타고 목포로 침투하였을 때 (74~75쪽), 그리고 광주사태가 끝난지 두 달 후 강원도 동해안으로 이동하였을 때 (88쪽),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있다.

탈북여성의 증언의 수확적 정확성은 잠수함 타고 침투한 북한군은 11영씩 한 조였다는 증언으로 확인된다: "조 편성 발표가 끝나고 사복차림의 지휘관은 타격대장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조는 즉시 잠수함에 승선할 것을 지시했고" (74쪽); "다른 때와 같은 가상적인 훈련이 아니라 이번만은 실제적인 상황이라는 현실이 배안에 타고 있던 11명의 전투요원들을 긴장시켰다" (75쪽). "11명의 침투요원들은 잠수함에서 내리기 전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목숨을 바치며 적들의 손에 잡히면 무조건 자폭을 한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였다고 한다" (76쪽),

"미리 침투해있던 7명의 인원들과 합류한 안창식을 비롯한 11명의 인원들은 여러 개의 소조로 분산되어 전라도 현지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조직들이 사전에 확보해놓은 무기고들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한편 새로운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3개월여 동안 전라도 전 지역에 대한 정찰을 이 잡듯이 샅샅이 진행하였다고 한다" (81쪽).

위의 동영상은 1996년 김영상 정부가 한창 5.18(인민)재판을 진행시키던 무렵 일어난 사건을 보여주는데, 잠수함 타고 침투한 무장공비들은 11명씩 한조가 되어 움직였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가 광주사태에 대하여 또 하나 전혀 알지 못하고 있던 사실은 광주에 침투하였던 북한군들 중 자폭한 북한군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위의 탈북여성도 "11명의 침투요원들은 잠수함에서 내리기 전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목숨을 바치며 적들의 손에 잡히면 무조건 자폭을 한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였다고 한다" 고 증언했다 (76쪽). 우리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반신반의한다. 그러나,
http://cafe.daum.net/issue21/5304/110 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는 아래의 동영상은 1996년 9월 17일의 강릉 북한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18일 16시30분 청학산에서 11명의 북한군이 자폭하였다.

광주사태의 불가사의 중 하나가 바로 교도소 습격 사건이었다. 광주사태 사망자 대다수는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하였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교도소를 습격하였는지에 대하여 여태껏 5.18단체들이 답변을 못하고 있다. 그 답변은 시민군 편에서 전투에 참가했던 북한군 지휘관 안창식이 말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83~84쪽), 그 지휘관이 바로 이 증언 수기를 쓴 여성의 두 자녀의 아빠이다.

그녀는 교도소 습격 작전 때 중상 입은 북한전투요원을 시민군이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후송한 사실도 증언하는데, 자신의 두 자녀의 아빠가 인솔한 부하에 대한 증언이기에 정확한 증언인 것이다. 이처럼 탈북자들의 5.18증언록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증언1의 모든 내용들이 남한 자료들과 부합하여 그 사실성과 객관성이 입증된다

 

광주사태 주동자들의 친미 유언비어와 반미행동

장갑차와 기관총과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시민군은 5월 21일 오후에 저절로 생겨났는가? 김대중의 사조직은 이미 5월 9일에 전민봉기 마스터 플랜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송선태가 작성한 광주의 김대중의 사조직의 내부 문건, 이른바 '자유' 문건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일으키려 했던 전민봉기의 주 목적이 반미 연방제 통일이었음을 이 문건은 이렇게 밝힌다:

"오늘의 한국사회는 신식민지 반봉건사회로 규정할 수 있으며 시민혁명을 통해 민주화와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 ("정사 5·18" 118쪽). 이어 이런 놀랄 만한 내용이 그 비밀문건에 기록되어 있다: "농촌 파급효과를 위해 공용터미널 바로 앞인 북동성당으로 장소를 정하고 죽창과 바테리를 준비하며 방송국, 공공건물, 예비군 무기고 접수를 고려한다" ("정사 5·18" 124~125쪽).

영화 "화려한 휴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장면들을 보여준다. 어떻게 5월 21일 오후에 시민군 기관총 총탄이 빗발처럼 도청에 날아들어와 꽂힌 후 그 다음날 아침 그토록 말쑥하게 정리되어 있을 수 있는가? 시민군에 의해 함락된 이후 시민군 사령부겸 임시혁명정부, 즉 해방구 본부로 사용되던 도청이 그날 그렇게 잘 정돈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 는 무장폭도들이 도청을 점령하여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광주사태가 발생하기 이미 사흘 전인 5월 15일에 김대중의 시조직은 도청 접수를 결정하였음을 "정사 5·18"은 전남대 총무 양강섭의 증언을 인용하여 이렇게 기록한다: "15일부터 집행부 내부에서는 도청접수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됐다.

한상석, 송선태, 정동년, 김상윤 등이 모여 회의를 했다" (126쪽). "협조적인 시민들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고교생을 동원하는 문제, 그리고 도시 침투에 대해서 논의했다. 특공대 조직까지 거론됐다" (정사 5·18 126~127쪽).

영화나 사진에서 북한군이 탈취해 준 군용차량을 시민군이 타고 다니면서 태극기를 달고 다니는 장면을 보았는가? 광주사태는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여기던 세력이 남한을 북한에 종속시키는 연방제 통일을 목적으로 전민봉기를 일으키려다 전라도 외의 지역으로 확산시키지 못한 불발탄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북한세력에 충성하던 운동권 지도부가 시민군에 다량의 태극기를 지급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광주시민들의 협조와 호응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이들은 군용 지프 등 탈취 차량에 태극기를 달고 다녀 사람들을 혼동시키는 자들이었다.

그러면 왜 윤한봉의 현대문화연구소와 김상윤의 녹두서점 등 김대중의 사조직들은 도청을 접수하려 하였을까? 친북세력에 내린 김일성의 비밀지령이 그 유력한 단서이다: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총 공격을 개시해야 합니다. 전국적인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 전화국, 변전소, 방송국 등 중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임시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남과 북의 전략적 배합으로 혁명적 대 사변을 주동적으로 앞당길 수 있습니다."

5월 21일 전라도 전 지역에 산재해 있던 무기를 단숨에 동시에 탈취하던 광주시민군 중에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이 섞여있었다고 추정되는 단서 중 하나가 바로 이 자료이다.

5.21일 아침 오전 8시, 시위대는 극비로 이루어지는 20사단의 이동계획을 미리 알고 광주 톨게이트에 300명이 매복해 있다가 화염병을 던지는 등의 공격에 의해 14대의 지휘차량을 빼앗아 곧장 아시아자동차로 갔다. 오전 9시,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는 또 다른 300명이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왔다. 이들 600명은 장갑차 2대와 군용트럭, 대형버스 등 328대를 탈취했다. 이 차량들은 누군가에 의해 17개 시군에 걸쳐 있는 38개의 무기고 및 폭약저장소, 뇌관저장소, 도화선 저장소 등으로 일사불란하게 할당되었고, 낮 12시부터 오후 4시에 이르는 동안 38개의 무기고 및 폭약저장소들을 마치 외과의사가 족집게 수술을 하듯이 무기고로 곧장 달려가 2개 연대 무장에 필요한 엄청난 양의 무기를 탈취했고 8톤 트럭 한 대 분의 다이너마이트와 이를 무기화한 뇌관도 도화선을 탈취했다. 이는 군사작전이지 시민들의 시위가 아니라고 의심했다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100-101쪽).

17개 시군에 걸쳐 있는 38개의 무기고를 단숨에 탈취하면서 서남으로는 우수영, 남쪽으로는 완도, 그리고 동남으로는 벌교까지 이동한 광주시민군의 행군 속도가 얼마나 신속하였는지 놀랍기만 하다.

http://study21.org/518/photo/daily/5-21map.jpg 에서 다운받을 수 있는 위 지도는 5월 21일 오전부터 시작된 광주시민군 무기탈취 작전지도이다. 정오를 기해 전라도 전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경찰서 습격 및 파괴 그리고 무기 탈취가 자행되어 작전 4시간 만에 38개의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였다. 광주로 반입된 무기는 그 중 일부일 뿐 전라도 전 지역으로 무장봉기가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반 광주시민은커녕 광주향토사단 군인들조차 도저히 전라도 전 지역 어디 어디에 무기고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더구나 정부가 손쓸 기회를 주지 않고, 4시간만에 38개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할 수 있는 것은 북한군 특수부대만이 할 수 있는 작전이다. 무기탈취조 중에 김봉수 등 김대중의 사조직과 광주시민들도 있었으나, 김대중의 사조직 단독으로 이토록 엄청난 무기탈취 작전을 외과의사가 족집게 수술을 하듯이 정확하게 그리고 과감하게 순식간에 해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앞에서 양강섭이 증언하는 도시 침투 작전에서 1차 공격 대상은 서울이었다. 그 사실을 황석영은 그의 저서 "광주5월민중항쟁의 기록-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이 날, 오전 처음에는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전주·서울 방면의 진출을 시도했던 시위대들을 광주-장성 사이의 사남터널 부근에 대기중이던 계엄군에 의해 강력한 제지를 받게 되자 그쪽 방향을 포기하고 주로 전남 도내 각, 시 군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211쪽).

아래 문건은 김대중의 국민연합 사무국장 윤상원이 시민군 5월 21일 작전상황을 보도한 5월 22일자의 투사회보 2호이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6_2018.html 에 그 전문이 있는 위의 투사회보에서 "21일에는 장성에서 화순에서 나주에서 다수의 차량과 무기가 반입되었다. 전주에서는 도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는 문장이 있다.

위 동영상 3:33에서 천주교의 김신부가 가짜 뉴욕타임즈 지를 들고 와서 이렇게 외친다. "이 외신 기자가 나한테 얘기했어요. 5일간만 더 버티면 우리가 이길 거라고." 그런데 위의 대자보에서 보듯 며칠간만 더 버티면 시민군이 이긴다는 주장은 강민우의 실제인물인 윤상원이 한 말이었다. 사기꾼들의 영화에서 김신부가 계속해서 말한다. "아 그거뿐이 아닙니다. 지금 부산항으로 미국의 항공모함이 들어오고 있다고." 그런데, 그 즉시 시민군 대장이 김신부를 묵사발 만드는 것이 아닌가. "5일만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 그 말은 어쩌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5일뿐이라는 뜻일 거요."

실제 역사에서 미국 항공모함 유언비어는 강민우의 실제인물 윤상원이 퍼뜨린 유언비어였다. 그런데 윤상원을 미화하는 영화 화려한 휴가 제작자는 윤상원의 거짓말을 감추어 주려는 꼼수를 낸다는 것이 김신부가 "이 외신 기자가 나한테 얘기했어요. 5일간만 더 버티면 우리가 이길 거라고"라고 말하는 대사와 시민군 대장이 "5일만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 그 말은 어쩌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5일뿐이라는 뜻일 거요" 대사로 어영부영 넘어간다.

그런데,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5월 22일 해방구를 설치하였을 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5일뿐이라는 뜻일 거요"라는 김빠지는 소리하면서 설치한 것이 아니었다. 위의 대자보가 보여주듯 승리의 날은 머지 않았다며 전국적 무장폭동을 선동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화려한 휴가 제작자는 훗날 5.18 당사자들이 미국문화원에 불을 지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여기서 신문을 준 외신기자란 푸른 눈의 목격자 힌츠페터를 가리킨다. 그런데 김신부의 그 대사는 가히 힌츠페터가 명예훼손 소송을 걸 만한 거짓말이다. 힌츠페터가 두번째 광주로 들어온 날은 5월 23일이었으나, 22일에는 광주에 있지도 않았다.

도대체 언제 그가 5일간만 더 버티면 광주시민군이 이길 거라고 말하였단 말인가? 그리고 만약 독일인 힌츠페터가 김신부에게 5일간만 더 버티면 광주시민군이 이길 거라고 한 말이 불만이었다면 독일인 힌츠페터에게 항의할 문제일텐데, 왜 미국문화원들에 불을 지르는가? 도대체 5.18 당사사자들의 행동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영화 화려한 휴가 제작자를 혼동시켰을까? 그것은 미국 항공모함이 광주시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항공모함을 보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시민군 지휘부에서 광주의 미국인들을 인질로 납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탈레반 인질 아이디어가 이미 광주사태 때 있었던 것이다. 시민군 김결은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미국인을 잡아다 감금시키고 그들을 미끼로 계엄군과 협상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기독병원 부근에 양키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궐기대회장에 같이 있었던 기종도씨, 최운용씨 외 몇 사람을 만나 나의 생각을 말했다." 그리고, 황석영은 그의 5.18 저서에서 미국이 그 기미를 채고 5월 21일 광주의 미국인들을 대피시킨 사실을 원통해 한다.

자, 이것이 헷갈리는 문제이다. 만약 미국이 광주시민군 편이었다면 광주시민군이 미국인들을 인질로 납치하려 하여야 했을 이유가 무엇인가? 영화 화려한 휴가 제작자가 아무리 꼼수를 써도 이것이 헷갈리는 문제이니깐 시민군 대장 박흥수를 시켜 "미국이 우리 편이라면 진작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라고 말하게 한다.

즉, 시민군 지도부의 반미주의를 아주 완곡하게 표현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아래 사진에서 보듯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여기며 남한을 북한에 종속시킬 목적으로 전민봉기 음모를 꾸몄던 좌익세력은 철저한 반미주의자들이었다. 한미동맹을 해체시킨후 적화통일을 달성하려는 그들의 논리는 광주사태 25주년 기념 국민대회에서도 이렇듯 여전하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윤한봉과 더불어 광주사태 배후인물이었던 문익환목사를 남조선의 통일애국인사로 추앙하며 그의 서거 추모회를 해마다 평양에서 챙기고 있다.
(http://www.korea-np.co.jp/news/ViewArticle.aspx?ArticleID=12650 )

광주사태와 적화통일의 함수관계를 북한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광주민중항쟁 계승하여 반미민족공조투쟁으로 2005년을 조국통일의 전환적해로 빛내이자" (http://www.korea-np.co.jp/news/ViewArticle.aspx?ArticleID=17169 )
만약 민주주의 국가 미국은 광주시민군 편이라는 논리로 광주사태를 일으켰던 것이라면 지금 어째서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광주가 북한 편을 드는가? 그건 앞뒤가 안맞는 얘기이다. 자, 광주사태 25주년 기념 국민대회 배후에 북한의 지령이 있는 것이 사실인가? 아래 자료들은 여전히 광주사태 행사들에 북한세력이 개입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광주사태 25주년이 바로 미국 문화원 점거 20주년인바, 그 의의를 조선신보는 이렇게 보도한다:
평양에서 남조선청년학생들의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투쟁 20돐을 기념하였다.

광주인민봉기 5돐을 계기로 남조선에서 반미기운이 급격히 높아지고있던 주체74(1985)년 5월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남조선의 여러 대학 학생들은 서울 '미국문화원'을 점거하고 광주학살만행에 대한 미국의 사과를 강력히 요구하는 성명서를 랑독한 다음 반미구호들을 웨치면서 련 4일동안이나 완강하게 싸웠다.

이들의 의로운 투쟁은 미제에게 커다란 공포와 불안을 안겨주었으며 남조선에서 반미자주화투쟁을 보다 고조시키는데서 중요한 계기가 되였다.

23일에 진행된 평양시보고회에서 한 기념보고에서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중앙위원회 김경호1비서는 서울《미국문화원》점거투쟁은 미제침략자들에 대한 남녘겨레의 쌓이고 쌓인 원한과 분노의 폭발이였으며 미국의 군사적강점을 끝장내고 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을 쟁취하려는 남조선청년학생들의 강렬한 지향과 불굴의 의지를 힘있게 과시한 장거이라고 강조하였다. (http://www.korea-np.co.jp/news/ViewArticle.aspx?ArticleID=17238 )

그 이전에도 5월 광주정신이란 바로 반미 적화통일투쟁임을 양측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5.18민중항쟁 22주년기념행사위원회'의 주최로 5월 18일 광주의 전남도청에서 진행된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규명하는 5.18시민법정'에서는 당시 미국대통령, 주'한'미군 사령관, 미국방장관 등을 피고인으로 기소하여 모두에게 내란죄, 집단살해죄, 인도에 반한죄로 유죄판결을 내렸다. (....)

한편 5월 29일 통일교육협회가 주최한 통일교육아카데미가 열렸는바....

또한 조국통일범민족련합 남측본부 주최로 19일 광주시 금남로에서 진행된 '범민련, 한총련 리적규정 철회, 6.15민족통일대축전 성사 범민련결의대회'에서 리종린의장은 '오늘의 5월 광주정신을 계승하여 6.15남북공동선언리행의 거족적인 반미자주통일투쟁으로 조국통일의 문을 열자'고 호소하였다. (http://www.korea-np.co.jp/news/ViewArticle.aspx?ArticleID=3569)

5.18 이들은 서울의 미국문화원을 점거하기 3년 전인 1982년에도 부산 미국문화원에 방화하였었는데, 적화통일세력은 그 25주년 담화를 이렇게 발표했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대변인은 남조선청년학생들의 부산《미국문화원》방화투쟁 25년이 되는것과 관련하여 18일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남조선청년학생들이 미국의 군사적강점과 식민지지배를 반대하여 부산《미국문화원》방화투쟁을 벌린 때로부터 25년의 세월이 흘렀다.

1982년 3월 18일 부산시의 청년학생들은 《미국 나가라!》, 《미국의 신식민주의를 규탄한다!》 등의 구호가 적힌 삐라들을 뿌리고 《미국문화원》에 불을 지르면서 격렬한 반미투쟁을 벌렸다. (ttp://www.korea-np.co.jp/news/ViewArticle.aspx?ArticleID=25838 )

지난 해 2009년에도 북한은 광주사태를 아래와 같이 옹호하였던바, 이는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여기는 사상에 세뇌되어 있었던 자들이었음을 그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론설은 광주인민봉기는 미제와 남조선군사깡패들의 파쑈통치를 반대하고 민족의 자주권과 사회의 민주화,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정의의 반미, 반파쑈항쟁이였으며 독재권력의 무자비한 무력탄압에 결사적으로 맞선 대중적인 무장봉기였다고 지적하였다.

봉기는 미제야말로 남조선인민들의 '보호자', '벗'이 아니라 자주권과 민주주의의 교살자, 흉악한 침략자, 살인마이며 이런 강도배들을 두고서는 언제 가도 사회의 자주적발전과 진보, 민족의 단합과 통일을 실현할수 없다는것, 일단 시작한 투쟁은 끝까지 완강히 벌려야 하며 그럴 때만이 최후승리를 이룩할수 있다는 피의 교훈을 새겨주었다고 론설은 지적하였다.

(http://www.korea-np.co.jp/news/ViewArticle.aspx?ArticleID=36776 )

이어 동년 5월 23일에 '로동신문'은 개인필명의 논평 '거족적인 애국성전의 불길'을 실었는데, 그 내용을 발췌하면 이러하다.

오늘은 남조선청년학생들의 서울 '미국문화원'점거투쟁이 있은 때로부터 24돐이 되는 날이다.

광주인민봉기 5돐을 계기로 남조선에서 반미기운이 급격히 높아지고있던 1985년 5월 23일 애국적청년학생들은 서울 '미국문화원'을 점거하고 광주학살만행에 대한 미국의 사죄를 강력히 요구하면서 4일간에 걸쳐 완강한 반미투쟁을 전개하였다.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투쟁은 우리 민족에게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들씌워온 미제침략자들에 대한 남녘겨레들의 쌓이고쌓인 원한과 분노의 폭발이였으며 외세의 군사적강점을 끝장내고 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을 되찾으려는 남조선청년학생들의 강렬한 지향과 불굴의 의지를 힘있게 과시한 장거였다.

서울 '미국문화원'은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사상문화적침략과 지배의 현지거점으로서 오랜 세월 인민들의 자주의식을 마비시키고 숭미사대사상과 썩어빠진 미국식생활양식을 만연시켜온 죄악의 소굴이였다. 그에 대한 공격은 미제의 식민지통치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으며 남조선의 각계각층 인민들을 사회의 자주화와 민주화,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로 적극 불러일으킨 대중적인 반미성전의 홰불로 되였다. 이 의로운 투쟁에 고무된 남조선청년학생들은 그해 11월에는 부산미국은행, 12월에는 광주 '미국문화원', 그 이듬해 5월에는 부산 '미국문화원' 등 미국의 식민지통치의 아성들을 련속 기습공격하면서 과감한 투쟁을 벌리였다. 그 거세찬 투쟁의 불길속에 남조선에서 반미자주화는 막을수 없는 대세로, 돌려세울수 없는 시대의 흐름으로 되였다.

(....)남조선인민들은 24년전 침략자와 매국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열혈청년들의 애국정신을 이어 서울《미국문화원》에서 타오른 반미투쟁의 홰불이 이르는 곳마다에서 반미자주화투쟁의 거세찬 불길로 타번지게 하여야 한다.하여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식민지지배와 그것을 뒤받침하는 리명박역도의 《실용》파쑈독재통치를 끝장내고 자주, 민주, 통일의 념원을 하루빨리 실현해야 할것이다.

력사와 현실은 남조선의 각계각층 인민들을 거족적인 반미성전에로 부르고 있다.(http://www.korea-np.co.jp/news/ViewArticle.aspx?ArticleID=36839 )

2008년에 광우사태가 일어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던 북한은 5. 18정신 이어받아 광우사태가 일어날 것을 이렇게 보도하였다. 즉,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는 명분이요, 그 본 목적은 남한을 북한에 종속시키는 연방제 적화통일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노동신문은 이렇게 보도한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수많은 단체들과 청년학생들, 각계층 인민들이 광주인민봉기자들의 투쟁정신과 기상을 이어 자주화투쟁, 반리명박투쟁에 떨쳐나서고있다. 얼마전에도 그들은 《광주민중항쟁렬사들의 5. 18정신 이어받아 미군없는 세상,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통일세상 건설하자》라는 구호를 웨치며 민족자주와 조국통일을 위한 결의대회와 집회들을 벌리였다. 범민련 남측본부, 범청학련 남측본부, 《한총련》, 남북공동선언실천련대 등 남조선의 많은 통일운동단체들과 시민단체들은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높이 조국을 통일하자》,
《미국의 반북대결돌격대 리명박을 심판하자!》라는 구호를 들고 힘찬 투쟁을 벌리고있다. (http://www.uriminzokkiri.com/Newspaper/RoDong/2008/2008-05-18-B07.htm )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 아무리 5.18 단체들이 팥을 콩이라고 우기며 그 말에 속아넘어간 사람들이 많아도 팥은 콩이 아니다.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뿌린 것은 친북 반미로 특징지어지는 좌익이념이었다. 그러기에 북한은 지난 30년간 줄곧 5.18을 옹호해왔다.

만약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었다면 북한이 시민군을 원수로 여기지 않았겠는가?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강진우의 실제인물인 윤기권이 1991년 보상금 2억 수령후 월북하였던 것도 광주 시민군이었던 자가 월북하면 북한에서 대환영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북한이 지상낙원이라는 시각에서 자주, 민주, 통일투쟁을 말했던 것이기에 그들이 말하는 민주는 우리가 이해하는 민주와 처음부터 달랐다.

자유북한방송은 2월 10일자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 인터넷판을 인용, "지난 1월 27일 '전체 조선민족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채택하고 적화통일을 위한 남녘 각 계의 봉기를 촉구한 북한이 당시 채택과 함께 2012년을 통일강성대국의 원년으로 규정했다"고 보도했다. http://www.korea-np.co.jp/news/ViewArticle.aspx?ArticleID=40304 에 있는 기사대로 북한은 평화협정회담 제안 및 남조선에서의 자주, 민주, 통일투쟁 선동 등의 방법으로 한미동맹만 파열시키면 남한을 점령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 즉, 5.18측이 기치로 내세워온 자주, 민주, 통일투쟁을 그대로 이용하여 북한은 김일성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12년까지 적화통일을 달성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광주사태 당시 서울대 대자보에 실린 북한말 구호

 

광주사태의 한 절정이었던 1980년 5월 21일 오후 2시경부터 북한군이 광주시내 몇몇 장소들을 무기 분배 장소로 정하고 시민들에게 무기를 나누어 주며 무장단체 편성을 하던 중 한번은 실수로 북한말을 쓴 사건이 있었다.  전 조선작가동맹 작가는 자기가 전해들은 대로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한번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고 나눠주는 장소에서 광주시민 한 사람한테 정체가 노출될 뻔한 위험한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20대 중반의 여성(대학생 정도로 생각했음)에게 무기를들라고 하자 그 여성은 무기를 받을 생각을 안 하고 복면하고 있는 자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만 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쌍간나새끼 괴뢰군 새끼들 몰려오는데 총안잡고 뭐하고 서있니?" 총을 넘겨받을 생각도 안 하고 자기 얼굴만 빤히 쳐다보던 여성이 그에게 "아저씨 광주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나요?  순간 그는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고 했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p. 330). 

자신이 실수한 것을 알아챈 북한군은 그녀를 미행하여 그녀가 다른 시민에게 "오늘 복면을 한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분명히 아니고 외지에서 온 사람들 같아보였어요" (상게서. p. 331)라고 말하는 순간 두 명을 모두 총으로 쏴 죽였다.  그래서 북한군이 광주에서 북한말 쓴 흔적은 남아있지 않으나 위의 증언을 부분적으로 입증해 주는 사실들이 있다.  탈북자들은 광주사태 때 몇몇 광주시민들은 간첩의 침투 낌새를 알아차렸다고 증언하는 것인데, 그것은 사실이다. 

지난 3월 26일 천안함이 침몰한 이래 많은 이들이 북한의 개입 낌새를 알아차리고 있다.  광주사태 때도 광주시민들이 느낀 간첩 침투의 낌새가 있었다.  그해 1980년 5월 19일 광주에 온 지 하루만에 80만 광주시민을 대표 자격으로 광주시장과 협상하였으며, 이틀 만에 전남지사와 협상하였던 광주의 영웅 전옥주를 어째서 바로 그 다음날이었던 22일 광주시민들 스스로 체포하여 계엄군에게 인계하였던가?  간첩은 전옥주에게 쪽지를 주며 선무방송을 시켰던 자들 중에 끼어 있었다.  따라서 22일의 궐기대회 도중 광주시민들이 전옥주를 가리키며 "저 여자다 간첩이다!"라고 외쳤을 때 광주시민들이 약간 실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은 아니었다.  분명 전옥주를 배후조정하는 불순세력이 있었다.

광주사태 당시 간첩들이 침투하여 있었음을 보여주는 물적 증거는 대자보로 남아있다.  북한군 특수부대가 아무리 몇 달간 서울말을 연습한 후에 침투하였어도 자기로 모르는 사이 입에서 "쌍간나 새끼"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실수를 한 북한군이 있었다.  그런 실수를 간첩은 1980년 5월 2일자의 저 유명한 서울대 운동권 대자보 "

維新殘黨 打倒總力을!!"에서도 하였다.  그해 5월의 전국 대학가 대규모 시위는 그 대자보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대자보에 북한말들이 박혀있다.  그러면 서울대 운동권이 서울말을 몰라 북한말을 골라 썼던 것인가?  도대체 어떤 북한말이었으며, 어찌된 영문이었는지 살펴보자.

북한 온라인 매체인 '우리민족끼리'는 지난 2010년 4월 5일 '산 송장의 역겨운 행각 놀음'이란 제목의 논평을 내고 "황가놈이 도적고양이처럼 숨어 다니지만, 결코 무사치 못할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여기서 황장엽씨를 '황가놈'이라고 부르는 것은 북한식 표현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북한말들이 30년 전의 서울대 대자보에 그대로 담겨있는 것이다.  1982년에 출판된 북한판 5.18 도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560쪽은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발췌 인용한다:<박가의 양자인 전가는 애비가 준 보안사령관직에 중앙정보부장서리직까지를 두팔에 감싸안고있었다.

애비의 뒤를 이어받아 유신잔당을 옹호하고 나아가 애비의 직위를 되찾아 독재자가 될 스스로의 모습을 꿈꾸며 비상계엄령을 그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가가 틀어쥐고있는 포고령의 역할은 과거 유신하의 긴급조치와 무엇이 다른단 말인가, 비상계엄령해제는 유신하의 구악의 청산과 국민투표헌법개정을 위한 선결조건이다. 반격을 위한 유신잔당의 준동이 명백한 이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학우여 유신잔당타도에 우리의 모든 력량을 총집결하라.>>

위의 인용구에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계속 '전가'라고 부르는데, 당시 남한 학생들은 읽어도 전가가 누군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남한에서는 그런 말을 쓰지 않는다.  이 대자보는 신현확 국무총리를 '
申家'라, 최규하 대통령을 '崔家'라 부르는바, 그 단락을 인용하면 이러하다:

<<
申家는 어떠한가.1
강물을 흐리는 미꾸라지처럼, 진작없어져야 할
日帝의 잔재가 독재정권의 하수인으로서 3·15 不正선거를 자행하더니 아직도 까딱거리며 유신의 찌꺼기가 되어 「유신체제를 필요한 것이었다.」라는 따위의 망언을 되풀이 하고 있구나! 日帝의 황민화 교육에 종사하던 전직 「선세이」 崔家· 독재정권하에서 外務部 要職을 거쳐 次官 및 국무총리를 지내더니 이제는 全家의 꼭둑각기사 되어 극가 두드리는 장단에 맞쳐 춤추고 있다.>>

이런 문구의 대자보가 서울대 학생이 쓴 대자보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서울대 운동권 대자보에 조예가 깊은 한홍구에게 물어보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아니, 유시민에게 물어보아도 그 사실은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남한 말에서는 황장엽씨를 황가놈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1980년 봄에도 우리는 신현확 총리를 '신가'라고, 최규하 대통령을 '최가'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1980년 5월 2일자의 서울대 대자보에 북한말들이 박혀 있던 것인지 한홍구의 해명을 들어보아야 하지 아니하겠느가. 

한홍구의 해명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잠정적으로 추적해 본다면 이 대자보는 북한의 대남공작기관에서 작성하여 광주운동권 윤한봉이 남한말로 조금 다듬어 서울 운동권 문국주와 조성우를 시켜 서울대 벽보에 붙이게 하였다.  이런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몇가지 팩트들은 북한에서 1981년에 당 간부들을 대상으로 광주 폭동 1돌 기념 강연이 있었고, 그 내용이 그 이듬해 1982년에 평양 조국통일사 편으로 발간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윤한봉이 그의 회고록 51~53쪽 등에서 당시 전국 대학가 시위는 자신이 총지휘하였으며, 54쪽 등에서 당시 대국민성명서 등은 자신이 작성하였음 밝혀주는 사실 등이다.

탈북자들은 1981년에 당 간부들을 대상으로 광주 폭동 1돌 기념 강연이 있었다고 증언해 왔다.  그 강연 요지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우리 공화국은 남조선혁명을 주도할 수 있는 완전한 주도권을 쥐고 있다. 우리 군 특수부대가 남파된 것은 한 개 대대 인원이었다. 잠수함과 공중으로 은밀히 전라도에 스며든 우리 군은 자정이 지난 깊은 밤...계엄군을 광주시 교외에서 먼저 기습했다. 물론 기습할 때는 군복이 아닌 학생복과 시민들이 입는 옷으로 바꾸어 입고 사격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실제로 그런 당원 대상 정치 강연회가 있다는 사실이 최근에  확인되었다.  지난 4월 27일자 조선일보는 데일리NK를 인용, "지난 24일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진행된 당원 대상 정치 강연회에서 한 간부(당세포 비서)가 "최근 영웅적인 조선인민군이 원수들에게 통쾌한 보복을 안겨 우리 자위적 군사력에 대해 남조선이 국가적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보도하였다.  광주사태 직후 당원 대상 정치 강연회에서 광주사태에 북한이 개입하였음을 밝힌 북한은 천암함 침몰 사건 직후에도 당원 대상 정치 강연회에서 그런 사실을 긍정하였던 것이다.

 자, 운동권 주장으로는 북한말이 박힌 저 위의 대자보가 민주화운동 대자보이다.  그런데, 일국의 국무총리를 북한말로 '신가'라, 일국의 대통령을 북한말로 '최가'라 비꼬아 부르며 그분들에 대한 흑색선전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한 대자보는 결코 민주화운동 대자보일 수 없다.  흑색선전 문구들로 가득한 대자보는 그 작성자의 편견을 반영하며, 그런 편견들은 민주주의의 실현을 어렵게 만들 뿐이다.
본래 비상계엄 하에서는 당국의 허락 없이는 시위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최규하 대통령은 1980년 봄에 학원 내 시위를 허용하였다. 

흔히 1980년 봄을 민주화의 봄이라고 일컫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학원 내 시위 허용이었다.  그리고 북한말이 박힌 저 위의 5월 2일자 대자보 이전에는 가두시위라는 것이 없었다.  오로지 교내 문제에 대한 학원 내 시위만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저 대자보를 기점으로 대학가 시위가 정치적 시위로 탈바꿈하였으며, 학생들의 가두시위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 대자보는 한국 근현대사에 일획을 그은 대자보였다. 

5월 3일부터 시작된 가두시위는 서울에서는 15일에, 광주에서는 16일에 그 절정을 이루고 18일에 급기야 광주사태가 터졌다.  이렇듯 그 가두시위의 기폭제는 북한말이 섞여 사용된 5월 2일자의 서울대 대자보 "
維新殘黨 打倒總力을!!"이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정치범들을 석방하였으며, 김대중 등 과격한 좌익인사들을 사면복권시켰으며, 민청학련 사건으로 제적되었던 운동권을 복학시켰고, 총학생회를 부활시켜 교내 시위를 허용하였다. 불과 몇달 사이에 최 대통령은 운동권에게 가능한 최대한의 양보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운동권이 최 대통령에게 고마움을 느꼈는가?  아니다.  위의 대자보는 이런 단락으로 시작한다:

<<
歷史上 조그만 勝利陶醉하여 하잘것 없는 戰利品獲得精神이 팔린 나머지 主力部隊한 경계를 疏忽히 하다가 大大的反擊을 받아 敗北는 수 없이 많다. 主力部隊完全히 섬멸시키지 못하는. 戰列再整備하고 새로운 同盟軍의 응원아래 再次 반격을 加할 가능성은 常存하는 것이다.

10·26
以後 6個月동안 우리는 一部政治犯의 석방과 復權一部 학우들의 復校등 조그만 승리에 들떠 있었고 학내 民主化나 병집거부등 사소한 戰利品획득에 精神이 팔려 있었던 것이 事實이다.>>
  그리고 그 아래 내용은 최 대통령에게서 그만한 양보를 얻어낸 것으로 만족해 하지 말고, 그 어른을 유신잔당으로 매도하여 짓밝아버리고, 그분의 정부를 타도하자는 것이다.  그란데 위의 북한말 대자보의 한 배후로서 광주운동권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 대자보 제목과 요지가 그대로 그 다음날 전남대 교정에 유인물로 뿌려졌기 때문이다.

당시 전국대학가의 모든 시위는 전남민주청년협의회에서 총지휘하고 있었다.  당시 전국의 시위는 광주운동권 윤한봉과 김상윤이 총지휘하였음을 밝히는 광주매일의 『
正史 5·18』은 그들의 전국전 민중봉기 선동전술을 이렇게 요약한다: "당시 운동역량을 고려, '학생이 전위에 서는 전 민중의 전국적 궐기'를 설정하고 역량을 강화하면서 시기를 조율하는 투쟁의 전략·전술이 선 것이다" (p. 113-114).
윤한봉은 광주사태 당시 시민군 대장이기는커녕 시민군도 아니었다.  그는 광주사태가 시작되자마자 도망다니기 시작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광주사태 때 광주에 없었던 윤한봉의 말 한마디로 5.18기념재단이 설립되었을만큼 그는 5.18 총사령관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이유는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그의 전남민주청년협의회가 전국 대학가의 시위를 총지휘하였기 때문이었다. 

전남민주청년협의회는 지하당 통일혁명당처럼 지하조직이었다.  그리고 합법적으로 사무실을 갖기 위해 위장명칭을 사용한 단체가 현대문화연구소였다.  윤한봉은 지하조직 전남민주청년협의회 명칭과 합법적 단체 현대문화연구소 명칭을 필요에 따라 번갈아가며 사용하였다.  전국 대학가 시위는 전남민주청년협의회가 총지휘하였으며, 주요 성명서 및 유인물들의 실제 작성자는 윤한봉이었다.

위의 북한도서에 기록된 대로, 위의 서울대 대자보는 <<학우여 유신잔당 타도에 우리의 모든 력량을 총집결하라.>>는 문장으로 끝났는데, 어감에 따라 지령으로 들릴 수도 있는 문장이다.  똑같은 말이 그 다음날 전남대 교정에 뿌려진 유인물에서는 "학원의 총역량을 유신잔당 타도에 집결시킬 것을 촉구한다!"로 실린다.  표현이 약간 부드러워진듯 하지만 동일인물이 쓴 문구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학원의 총역량이란 말인가?  대학교의 생명은 학문성이요, 학문성의 생명은 객관성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위의 선동구호대로 행동하면 객관성은 소멸된다.  민주주의는 일당 정치가 아니라, 양당 정치 혹은 둘 이상의 견해를 필요로 하는 정치제도이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하여 운동권의 시각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1970년대가 대한민국 경제 건국기의 중요한 시기였음을 모두가 송두리째 부정하는 대학교가 있다면 그 학교는 이미 객관성을 상실한 학교이다.  그럼에도 운동권의 편협된 시각만을 강요하며 학원의 총역량을 유신잔당 타도에 집결시키리고 선동하는 것은 전체주의이지,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다.

북한과 남민전과 광주운동권은 우리와 똑같은 한국말을 사용했던 것이 아니다.  북한과 남민전과 광주운동권이 말하는 '민주'의 개념이 전혀 다르듯이 '역량'의 개념 또한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와 다르다. 10월 2일자 대자보 작전의 승리를 위의 북한도서는 이렇게 해설한다: "당시 투쟁은 또한 학생들이 학교의 테두리를 벗어나 적극적으로 진출하는속에서 발전하였다.

5월12일까지의 기간에 10여개 대학의 학생들이 삼엄한 저지선을 뚫고 가두로 진출하였으며 마침내 교외에서 대규모적인 투쟁을 벌리였다. 이것은 학생운동과 폭압력량, 민주와 파쑈사이의 력량관계가 학생운동의 편에 유리하게 변동되고있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p. 560).  그런데, 폭압력량은 또 무엇인가?

김정일이 자기의 생일날인 1981년 2월 16일 당 간부들에게 "광주인민봉기는 수령님께 바치는 나의 생일 선물이었는데 우리의 역량이 너무 적어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p. 210) 말하였다.  여기서 우리의 역량이란 '북조선의 역량'인데, 그에 상응하는 '한국의 역량'이란 말이 우리에게 있는가? 

한 북한 작가의 부친은 북한의 안전부 비서였는데, 광주사태 당시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집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그때 병문안 오는 어른들이 오면 늘 광주사태가 화두였다. 누가 "혹시 남조선 놈들이 우리 군대가 나가면 침략자라고 할게 아니요." 라고 말하자, 그의 부친은 "남조선이 뭐 외국이요?  우리가 우리 땅을 해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수령님의 교시를 좀 연구하고 다니라구요. 남조선 인민들이 언제든지 우리에게 지원을 요청할 수 있으니 그 때면 남으로 진격할 수 있게 준비하라고 한두 번 교시하신 것이 아니요."라고 대답하였다. 

"그때부터 나는 광주시민들이 김일성의 남조선혁명 역량인줄로 알았다"고 이 작가는 회고한다 (p. 313).  여기서 '남조선혁명 역량'이란 북한말이다.  우리는 "광주시민들이 김일성의 남조선혁명 역량이다"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겉보기에 한국말 같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광주시민들이 김일성의 남조선혁명 역량이다"라는 말은 전체주의 국가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광주시민들이 김일성의 남조선혁명 역량이다"라는 전체주의 시각에서 광주사태를 조명할 때 하는 말이다.  전체주의 이념에서는 '광주시민들은 혁명 역량이다'는 개념이 형성될 수 있다.  그러나 개개인의 자유와 권익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이념에서는 그런 개념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아무개의 역량이 뛰어나다"라고 말하지, "광주시민들은 혁명역량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류의 표현은 북한에서 쓰이며, 광주운동권이 사용하던 표현이었다. 

이 탈북자는 광주운동권의 용어를 배운 적이 없다.  그는 북한에서 길들여진 용어대로 "그때부터 나는 광주시민들이 김일성의 남조선혁명 역량인줄로 알았다" (상게서, p. 313), "북한을 탈출해서 남한에 와 있는 이 순간까지 북한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광주폭동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이 북한 조선노동당의 지시를 받는 남조선의 혁명역량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상게서, p. 316) 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안쓰는 말들이 북한에 있다는 것은 북한사람들은 우리와 사고방식이 다름을 의미한다.  꽃미남이란 단어의 등장은 남성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남자답게 생겼다'는 칭찬이요,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다'는 흉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예쁜 남자'라는 말을 듣는 것이 자랑스러운 시대이다.  이처럼 단어는 그 사회 구성원들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그리고 같은 단어라도 어떻게 합성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엄청 달라진다.  한국어에 약간의 지식이 있는 어느 외국여성이 '오빠부대'의 의미를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한국음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마 검색엔진은 검색어 '오빠부대'와 검색어 '부대찌게'에서 '부대'는 그 의미가 전혀 다름을 몰랐던 듯하다.  같은 한국인이라도 북한주민들이 '오빠부대'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그리고 한국에서도 앞세대 어른들은 '오빠부대'를 맹호부대나 청룡부대와 동류로 혼동할 것이다.

북한에는 '오빠부대'와 같은 합성어가 없는 것처럼 남한에는 '혁명역량'과 같은 합성어가 없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께서 서거하시자마자 김일성은 "연락부(대남사업부)에서는 이 사태가 수습되기 전에 손을 써야 합니다. 남조선의 모든 혁명역량을 총동원하여 전민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적극 유도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1979년 11월 3호청사 부장회의).  김일성이 "모든 혁명역량을 총동원하여 전민봉기를 일으키라"고 지령을 내렸다.  우리는 도대체 혁명역량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모든 혁명역량을 총동원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바로 그 지령이 그대로 위의 1980년 5월 2일자 서울대 운동권 대자보에 박혀있다: "유신잔당 타도에 우리의 모든 역량을 총집결하자!"

1980년대의 광주운동권은 우리가 그 개념을 좀처럼 알 수 없는 '역량 합성어'들을 무수히 사용하였다.  그 한 예가『
正史 5·18』이 114쪽에서 인용하는 김상윤의 말이다: <<김상윤은 당시 광주운동권의 모습을 "서울을 비롯한 여타 지역의 투쟁역량과 방향이 분산되고 통일되지 못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여기에 '동네사랑방'같이 하나로 연결된 논리구조를 갖춰 바로 80년 5월 항쟁의 기본역량으로 옮겨진다"고 분석한다.>>  단 두 문장이지만 우리가 이 말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가? 

한마디로 서울에서는 투쟁역량이 분산되었으나, 광주에서는 기본역량으로 옮겨졌다는 것인데, 광주운동권 용어사전이 없이는 우리는 이 말뜻을 모른다.  김일성의 지령에 언급된 혁명역량과 김상윤이 언급하는 투쟁역량은 동의어이다.  북한의 대남공작이론과 광주운동권 이론에서는 역량은 전략·전술 개념 용어이다.  김상윤의 말을 풀이하면 광주에서는 무장봉기가 일어날 수 있었고, 서울에서는 무장봉기가 일어나지 못한 이유는 학생운동과 문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역량이 총역량으로 결집된 광주에서와 달리 서울에서는 아직 문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역량이 없었다는 말이다.

윤한봉은 1980년에 '광주운동권'이란 말을 입버릇처럼 사용하였다.  그런데, 무엇이 운동인가?  2008년의 광우사태도 운동이었는가?  물론 운동이었다.  그러나 반미자주화운동이었다.  그러면 반미자주화운동이 민주화운동이었는가?  운동에는 북한 조선노동당이 시킨 반미자주화운동이라는 것이 있다.  광주사태 때 북한이 광주운동권에 민주화투쟁을 전개하라고 하였다:

"남조선 내부에서 인민대중의 동력을 얻어 반파쇼 민주화투쟁을 강력히 전개하고 이것을 반미자주화운동과 결합시켜 나가야 한다."  그런데, 북한과 광주운동권은 민주화운동이라는 의미로 민주화투쟁을 말하지 않았다.  북한과 광주운동권 논리에서 '민주화투쟁'과 '반미자주화운동'은 한짝이다.  그것이 윤한봉과 그의 동지들의 일관된 신념이었다.  그들은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라는 의미로만 민주를 이해하였다.

광주운동권이 '혁명적인 민주역량'을 주장하였으며, 미국에 의한 남한의 통치를 끝장내고, 통일을 성공시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자고 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북한이 말하는 남조선혁명의 두번째 단계였다.  "북한의 '혁명적인 민주역량'과의 연합전선으로 미국에 의한 남한의 통치를 끝장내고 '북한식 인민주의의 통일'을 성공시켜서 남조선에서 사회주의 체제가 존재하는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p. 320). 

이정로가 그의 글 "광주봉기에 대한 혁명적 시각전환"에서 인용하듯 5.18측은 "전남지역의 9개대 총학생회는 '민족민주화 성회'를 주도하고 5월 15일 대학인의 민주역량을 총집결하여 반민주, 반민족세력과의 성전을 엄숙히 선포한 <제2시국선언문>을 채택한다"고 가록한다.  여기서 '대학인의 민주역량'은 광주운동권의 용어요, 북한 전체주의 국가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다.  북한의 '혁명적인 민주역량'과 광주운동권의 '대학인의 민주역량'은 똑같은 민주역량인가?  지금이라도 우리는 이 질문을 광주운동권에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고정희 시인은 월간중앙 1988년 5월호에 "광주민중항쟁과 여성의 역할/광주여성들, 이렇게 싸웠다"란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서 가톨릭노동청년회(JOC), 가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회, 광주YWCA, 한국 앰네스티 광주지부, 민주청년협의회, 현대문화연구소, 녹두서점 등의 운동권 "조직 속에 여성들도 조직의 일원으로 동참하여 민주역량을 키우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민주역량을 키웠기에 광주는 민주주의 선거가 불가능한 지역이 되었는가?  1993년에 귀국한 윤한봉조차도 광주에서는 특정후부에게 몰표를 주는 것을 보고 "광주는 민주화의 성지가 아니라 민주화의 망지"라며 통탄하였다.  전 주민이 한 후보에게만 몰표를 주는 북한에서나 광주에서는 선거 민주주의의 의미가 없다.  북한의 '혁명적인 민주역량'도 광주운동권의 '민주역량'도 모두 전체주의 이념 용어들이다.  그리고 그런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는 양립이 불가능하다.

 

(뉴스타운 Newstown / 메디팜뉴스 Medipharm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