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선생은 정치가요, 혁명가요, 교육자요, 문화주의자였다. 우리는 선생을 존경한다면서도 실상은 잘 모르고 있다. 흔히 김구선생을 독립투사로서나 혁명가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면만이 아닌 선생의 교육자적인 바탕 역시 이해하여야 한다.
나는 최근 뉴라이트 운동에 참여하면서 뉴라이트 운동의 사상적 계보를 살피면서 김구 선생을 중심에 모시게 되었다.
선생의 삶과 사상, 실천과 비전이 뉴라이트 정신과 운동에 가장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라 할 때의 백범(白凡)은 평범한 보통 사람이란 뜻을 지닌 김구 선생의 호이다. 이 호는 김구 선생께서 스스로 지은 호인데 자신은 이 땅에 와서 살다간 숱한 보통 사람들처럼 그렇게 평범한 사람 즉 민초(民草)로 살다 가겠다는 다짐으로 그렇게 지었다고 전해진다.
김삼웅 교수가 펴낸 『백범 김구 평전』의 서문에서 저자는 다음 같이 쓰고 있다.
"구한말에서 8.15해방에 이르기까지 평민 출신이, 평민 의식으로 백성과 민족을 위해 몸을 던져 헌신한 지도자는 흔치 않았다. 백범은 태어날 대부터 상민(常民)의 가정에서 상민으로 출생하고 상민의 삶을 사는 상민이었다. 신분 질서가 무너져 가는 시기이기는 했지만 반상의 위계가 엄존하는 사회에서 상민이 국가 주석이 된 것은 백범이 처음이다. 그것도 변칙이나 책략이 아니라 '받들려서' 그 위치에 올랐다.
조선왕조 500년사에서 '가장 신하다운 신하'가 다산 정약용이었다면 망국에서 식민시대 , 해방공간에 이르기까지 가장 평민다운 평민은 백범일 것이다."
백범의 삶을 살핌에 있어 가장 두드러진 점이 그의 일관된 정도론(正道論)이었다. 그는 70평생을 왕조시대, 망국, 독립운동, 임시정부, 해방, 분단, 신탁통치, 건국에 이르기까지 험난하였던 길을 걸어오는 동안에 우직스럽게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려 애썼다. 선생이 해방 후 중국에서 귀국하신 후 통일 정부수립을 위하여 노심초사 애를 쓰는 모습을 보며 곁에서 선생을 아끼는 분들이 통일 정부 수립이 불가능함을 충고할 때에 선생께서 다음 같이 말하였다.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정도(正道)냐 사도(邪道)냐가 문제이다. 외국의 간섭이 없고 분열이 없는 자주독립을 쟁취하는 것은 민족의 지상명령이다. 이 지상명령에 순종할 다름이다. 우리가 망명생활을 30여년이나 한 것도 가장 비현실적인 길인 줄 알면서도 민족의 지상명령 이므로 그 길을 택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원칙을 벗어난 기회주의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 우리 사회이기에 백범 선생 같이 정도를 걸은 분이 돋보일 수밖에 없다.
백범(白凡)은 1876년에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이름 석자 겨우 쓸 정도의 농사꾼으로 반골기질(反骨氣質)이 심한 분이어서 술에 취하였을 때는 마을 양반들에게 행패를 심하게 부리곤 하였다. 백범의 선대는 처음엔 상민이 아니고 한양에 사는 안동 김씨 양반이었으나 1651년에 일어났던 김자점(金自點)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온 가문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게 되었을 때에 황해도로 숨어들어 상민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백범의 독립투사로서의 기질은 이런 집안의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조선조에 허균(許筠 1569∼1618)이 쓴《호민론(豪民論)》이란 글이 있다. 이 글에서 허균은 백성들을 세 부류로 나누어 설명했다.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이다. 항민은 자신의 권리나 이익에 대한 주장이 없이 윗사람들에게 부림을 당하며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원민은 수탈당하며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항민과 마찬가지이나 이를 마땅치 않게 여겨 불평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호민은 맘속으로 딴마음을 품은 채로 틈을 노리다가 때가 되면 들고 일어나는 사람들이다.
이들 세 가지 백성들 중에서 항민과 원민은 두려울 것이 없으나 호민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에 대한 부당한 대우나 사회의 부조리에 대하여 도전하는 무리들이다. 때가 무르익어 호민이 깃발을 들고 일어나면 원민들이 그 깃발 아래로 모여들게 되고 뒤 따라 항민들도 살 길을 찾아 모여 들게 된다.
이 글을 쓴 허균도 호민으로서 사회개혁을 부르짖다 반역죄로 몰려 참형을 당하였다. 백범 선생은 집안 내력이 이미 호민에 속하는 집안이었다 할 것이다.
백범이 다섯 살 때에 강렬(康翎) 산골로 이사를 갔다. 지주들과 관의 횡포에 시달리다 못해 해변가로 피해 간 것이다. 『백범일지』에서 그곳 생활을 다음 같이 쓰고 있다.
"우리 집이 어떻게나 호젓한지 호랑이가 사람을 물고 우리 문전으로 지나갔다. 산 어귀 호랑이가 다니는 길목에 우리 집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밤이면 한 걸음도 문 밖에는 나가지 못했다."
그는 4 살 때 천연두를 앓아 생명만은 건졌으나 진한 곰보 자국을 남기게 되었다. 백범의 기질은 의협심이 강하고 활달한 아버지와 자애로우면서 강단이 있는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았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유달랐다. 그가 일본 밀정 스치다(士田讓亮)를 죽인 일로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 감영에 수감 되어 있을 때다. 그의 어머니는 인천항의 물상 객주집 침모로 있으면서 그 품삯으로 아들의 옥바라지를 하였다. 그가 출옥한지 얼마 후 친구들이 위로한답시고 기생을 불러 주연을 베풀었을 때에 그의 어머니께서 그를 불러 호되게 나무라기를 "내가 여러해 동안 고생을 한 것이 오늘 네가 기생을 데리고 술을 먹는 것을 보려고 한 것이었더냐!"하고 나무랐다.
그리고 훗날 그가 신민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17년의 징역형을 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옥살이 하던 때에는 그의 어머니가 면회를 와서 다음 같이 말하였다.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 우리 식구는 잘 있으니 염려 말아라. 옥중에서 네 몸이나 잘 돌봐라"
훌륭한 일꾼들에게는 언제나 훌륭한 어머니가 있었다는 말이 있듯이 백범의 어머니가 한 예가 될 것이다.
3.1절과 김구 선생
87년 전인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났던 만세운동이 실패로 끝이 나자 이 운동을 주도하였던 민족 지도자들은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출발 하였다. 그날이 만세운동이 일어 난지 불과 40일이 지난 4월 10일 이었다.
그때 백범은 신민회 사건으로 오랜 옥살이를 하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백범도 중국으로 망명키로 결심을 하고는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때의 사정을 백범은 "백범일지"에서 다음같이 쓰고 있다.
"기미년 3월에 일어난 만세 소리에 나는 고국을 떠나게 되었다. 떠날 날을 며칠 앞두고 나는 작인들을 동원하여 만세 부르는 운동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듯이 가래질을 하고 있었다.내 동정을 살피러 왔던 왜 헌병도 이것을 보고는 안심하고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백범은 치밀한 출국작전에 성공하여 4월 13일에 상해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그가 상해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5백여명의 동지들이 모여 있었고 임시정부가 출범한 직후였다. 임시정부에는 도산 안창호가 미국에서 와서 국무총리격인 내무총장직을 맡고 있었다. 도산에게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보게 해달라고 청원하며 다음같이 말했다.
"내가 감옥에서 소제를 할 때 내가 하나님께 원하기를 '생전에 한번 우리 정부의 청정(聽政)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 하였습니다."
백범의 청원을 받아들인 도산은 국무회의를 열고 그를 경무국장직에 임명하였다.
이에 백범이 나는 순사될 자격도 못되는 사람이거늘 경무국장이 당하냐고 반대하였으나 도산이 이르기를 "만일 백범이 사퇴하면 젊은 사람들 밑에 있기를 싫어하는 것 같이 오해 될 염려가 있으니 그대로 행공(行公)하라."고 강권하여 백범은 부득이 취임하였노라고 싣고 있다.
김구 선생의 어머니
백범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에서 임시정부 일을 보고 있을 때다. 그의 어머니와 아내가 조선에서 나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특별한 생계수단이 없었던 백범이었던지라, 가정생활이 곤궁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때 백범의 어머니는 이미 환갑이 넘은 연세였으나 중국인들의 쓰레기통을 뒤져 버려진 배춧잎을 주워서 반찬을 만들기도 하였다. 한번은 노모의 생일을 맞았을 때다. 독립 운동가들이 푼푼이 거둬 노모의 생일잔치를 차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백범의 어머니께서 그 돈을 자기에게 주면 입에 맞는 음식을 사다 먹겠노라고 하였다. 모두들 그러려니 하고 거둬들인 돈을 노모께 드렸다. 그랬더니 막상 생일이 되자 노모는 음식 대신 권총 두 자루를 내 놓으시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이역만리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생일잔치가 다 무엇이냐?"
1945년 11월 28일 백범이 조선기독교남부대회에서 연설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하여 다음 같이 말하였다.
"제가 외국으로 망명하기 전에 서대문형무소에 15년 형기를 받고 갇혀 있을 때에 어머님과 내 안해(아내)는 한 달에 한 번, 또는 두 달에 한 번 밖에 없는 면회를 하기 위하여 서울 와서 살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 성경말씀으로 늘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때 어머님께서 면회 오실 때마다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자조(자주) 오지 못할찌라도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말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너를 늘 위로해 주지 못하지마는 하나님께서는 늘 위로해 주시리라. 부디 늘 기도하는 중에 지내여라."
이렇게 말씀해주시곤 할 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마음에 든든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여자는 평범하지만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이 있다. 이 땅의 어머니들에게 꼭 합당한 표현인듯 싶다.
앞에서 두 차례에 걸쳐 김구선생의 어머니에 대하여 소개한 바이거니와 어머니들의 위대함은 비단 백범의 어머니만의 위대함이 아니었을 것이다. 시인 고은(高銀)이 백범의 어머니를 제목으로 삼아 한 편의 시를 썼다. '곽난정'이란 제목의 시이다.
물론 낫 놓고 기역자 알 리 없는
황해도 텃골 군역전 부쳐 먹는 쌍놈의 집 아낙입니다.
그런 아낙이 제 자식 창수가
대동강 치하포 나루에서 왜놈 한 놈 때려죽이고
물 건너 인천 감리역 옥에 갇히니
초가삼간 다 못질해버리고
옥바라지 객주집 식모살이, 침모 살이 해가며
차꼬 물린 살인죄 자식 면회 가서
나는 네가 경기 감사 한 것보다 더 기쁘다.
이렇게 힘찬 말 했습니다.
몇십년 뒤 여든 살 바라보는 백발노모
중국에 건너와
낙양군관학교 사람들이 생신날 축하하려고
돈 몇 푼씩 걷는 걸 알고
그 돈 미리 받아내어
생신날 단총 두 자루 내놓으며
자네들 걷은 돈으로 샀으니
내 생일 축하의 뜻으로 이 총 쏴
부디 부디 독립운동 이루어주시게
그 뒤 그녀는 여든 두 살로 중경 땅에서 눈감았습니다.
나라 독립 못 보고 죽는 것 원통하다
이 말이 그녀가 남긴 말 한마디 아니고 무엇입니까.
백범의 '나의 소원'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의 압제에서 조국이 해방되었다. 그러나 그 해방이 새로운 비극의 시작이 될 줄을 아무도 예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바로 남북 분단의 비극이다. 그리고 강대국들의 국정 간섭이다.
해방 후 중국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마치고 새 나라를 건설하겠노라는 큰 꿈을 품고 귀국한 독립 운동가들이 부딪힌 현실은 그들을 좌절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어른이 백범이다. 망명지 중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직을 지키느라 뼈를 깎는 고통의 세월을 조국 광복이란 하나의 목표로 인하여 견뎌 왔다. 그러나 광복 후 그들이 부딪힌 현실은 너무나 참담하였다.
조국은 이데올로기를 따라, 강대국들의 이익을 따라 분열되고 해방 정국은 다툼으로 날셀 줄 모르는 나날이었다. 거기에다 기라성 같은 민족 지도자들이 테러로 인하여 하나 하나씩 쓰러져 갔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백범은 '나의 염원(念願)'이란 글을 남겼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요."할 것이요 .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 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칠십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하여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요즘 들어 세계화란 말이 보편화 되면서 민족정기나 민족정신 내지 민족의식이 소홀히 여겨지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런 증상은 공부하였다는 소위 식자(識者)들 중에 더 심한듯하다. 뿌리 없는 나무가 있을 수 없듯이 민족의식 없는 지식이나 운동 역시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민족을 소중히 여기는 민족주의자임을 스스로 밝힌다.
백범의 민족정신은 타의추종을 불허할 만큼 두드러진다. 백범은 '나의 소원'이란 글에서 민족에 대하여 다음같이 쓰고 있다.
"나는 공자, 석가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 지옥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 진데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는 것이니 만큼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 어려움과 같은 것이다."
....
이에 대하여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통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로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마치 진리권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 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 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거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 어느 민족 내에서나, 종교로나, 정치적 경제적 이해의 충돌로 두파, 세파로 갈라져 피로써 싸우는 일이 있거니와 지나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에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뉴라이트 운동에는 세 가지 사상적인 뿌리가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민족주의와 공동체주의이다. 도산 선생이나 백범 선생 같은 선배들이 주장하였던 인류와 세계를 향하여 열린 민족주의가 뉴라이트의 민족주의이다.
백범의 열린 민족주의 정신
지난 날 일본이 펼치려 하였던 민족주의는 다른 민족을 지배하려는 민족주의였다. 중국이 내세워온 민족주의는 자기들이 중심에 서려는 민족주의이다. 그래서 패권주의라 부른다. 그러나 백범이 생각한 민족주의는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민족주의였고, 문화의 힘으로 세계에 앞장서자는 생각이었다. 그는 《나의 소원》 중에서 '민족국가'를 논하는 항목에서 다음 같이 쓰고 있다.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아직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 아무도 한 자가 없으므로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 놓으신 일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 볼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 남녀 모두가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에 낙을 삼기를 희망한다."
백범의 이런 글을 읽을 때면 그 어른의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느끼게 된다. 요즘 같이 생각들이 좁아지고 궁색하여진 때에 백범의 이런 글을 읽고 넓은 생각에 접할 수 있는 자체가 신선한 도전이 된다.
백범은 우리 민족이 미래의 세계 문화를 이끄는 사명을 감당하게 되기를 소원하면서 다음 같이 쓰고 있다.
"우리의 오늘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모욕하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序曲)이었다. 우리가 주연 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희랍민족이나 로마민족이 한 일을 못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자유주의의 신봉자 백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즈음 세계는 양 진영으로 갈라졌다. 민주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었다.
그 시절 새롭게 독립하여 나라를 꾸리게 된 지도자들에게는 민주주의 보다는 사회주의 쪽이 훨씬 매력이 있어 보이던 때였다. 그래서 많은 신생 독립 국가들이 사회주의 체제를 택하였다. 그래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 점에서는 현명한 지도자들을 만난 셈이다 해방 정국의 양대 지도자였던 이승만도 김구도 둘 다 자유민주주의를 선호하는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두 지도자들과 두 지도자를 정점으로 하는 양 대 세력들 간에 이승만 세력이 승리하여 정권을 잡긴 하였지만 김구와 그를 추종하는 세력도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백범은 앞에서 소개한 글, 《나의 소원》 중에서 '정치 이념'을 논하는 부분에서 자신의 정치 이념에 대하여 다음 같이 언급하고 있다.
"나의 정치 이념은 한 마디로 교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을 일이다. 국가 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런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는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 생활을 하는 우리들을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을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 개인 또는 일, 계급에서 온다. 일, 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혹은 독재라 하고 일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 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백범의 민주주의 사상
백범이 남긴 연설과 글을 읽어보면 그가 품었던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된다. 민주주의가 보편화 되지 못하였던 그 당시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음에 대하여 놀라움과 존경심을 표하게 된다. 앞에 글에서도 언급한 바이거니와 해방 정국의 그 극심하였던 사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김구 선생과 이승만 박사 양 거두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확신을 품고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이 우리들 후손들에게는 다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혜택이라 하겠다.
백범이 《나의 소원》에서 쓴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을 살펴 보자.
"나는 노자(老子)의 무위(無爲)를 그대로 믿는 자는 아니어니와 정치에 있어서 너무 인공을 가하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하는 자이다. 대개 사람이란 전지전능할 수가 없고 학설이란 완전무결할 수가 없는 것이므로, 한 사람의 생각, 한 학설의 원리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은 일시 속한 진보를 보이는 듯하더라도 필경은 병통이 생겨서 그야말로 변증법적인 폭력의 혁명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길이다. 작은 꾀로 자주 건드리면 이익보다도 해가 많다. 개인 생활에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다."
나는 백범의 글 중에서 이런 부분을 읽을 때면 마음속으로 감탄을 하게 된다. "정치에 있어 가장 좋은 길은 가만 두는 길이다." 이런 부분이 얼마나 탁월한 생각인가?
뉴라이트 운동은 철저하게 작은 정부 큰 시장을 추구한다. 작은 정부란 다름 아니라 백성들에 대하여 최소한의 간섭을 하는 정부를 일컫는다. 모든 민간 부분이 자율적인 원리와 질서로 물 흐르듯이 나라가 유지되어가게 하자는 생각이 뉴라이트의 생각이다. 이런 점에서 백범의 생각은 뉴라이트의 입장과 일치 된다.
문화와 교육에 대한 백범의 생각
백범은 제도 교육을 받지 않은 분이다. 이승만 박사가 세계의 명문인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박사까지 받은 최고의 지적 엘리트였음에 비하여 백범은 교육이라고는 고작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익힌 정도의 무학(無學)에 가까운 분이다. 그럼에도 그의 생각과 경륜의 깊이는 여느 교육을 받은 분에 비해 두드러진 바였다. 백범의 그런 생각과 경륜 중에 교육과 문화에 대한 생각이 특히 돋보이는 부분이다.
백범의 《나의 소원》이란 글 중에서 민주주의와 교육과 문화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자.
"민주주의란 국민의 의사를 알아보는 한 절차 또는 방식이지 그 내용은 아니다.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대한 복종 이들 세 가지가 곧 민주주의이다.......언론, 투표, 다수결 복종이라는 절차만 밟으면 어떠한 철학에 기초한 법률도 정책도 만들 수 있으니 이것을 제한하는 것은 오직 그 헌법의 조문뿐이다. 그런데 그 헌법도 결코 독재국의 그것과 같이 신성불가침의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절차로 개정할 수 있는 것이니, 백성이 나라의 주권자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라의 국론을 움직이려면 국민의 의견을 움직여야 한다.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 수정,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 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로 보아도 그러하다."
백범이 생각하는 민주주의
백범은 독재 정치에 대하여는 체질적으로 거부하였던 사람이었다. 그 독재는 개인의 독재 뿐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독재, 계급 독재까지 포함한 모든 독재에 대하여 그는 누누이 거부의 뜻을 밝혔다. 해방 후 초대 정권이었던 이승만 정권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백범과 같은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이 있는 지도자들이 이 나라를 이끌게 되었더라면 이 나라의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독재와 민주주의에 대한 백범의 글을 살펴보자.
"나는 어떤 의미로든지 독재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들을 향하여 부르짖는다. 결코 결코 독재 정치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 개인이 십분의 언론 자유를 누려서 국민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어떤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 제도가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 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이 반만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형태를 경험한 나라에서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 제도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가까이 이조시대를 보더라도, 홍문관(弘文館),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같은 것은 국민 중에 현인(賢人)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제도로 멋있는 제도요, 과거제도와 암행어사 같은 것도 연구할 만한 제도다.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文運)에 보태는 것이다."
진정한 우파 백범 김구
-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이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충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민족이 주연 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
백범이 남긴 글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 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나는 이 글을 대할 때마다 우리에게 이런 선배가 있었음에 대하여 긍지를 느끼게 되고 또 이런 선배들의 정신과 기상을 이어받는 좋은 후배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하곤 한다.
나는 우리 역사에 등장하였던 숱한 조상들 중에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넷이 있다.
쳇째는 신라의 원효 큰 스님이다.
둘째는 조선의 다산 정약용이다.
셋째는 일제시대의 도산 안창호이다.
넷째는 지금 쓰고 있는 백범 김구이다.
흔히 말하기를 우리역사에는 예나 지금이나 존경하고 따를만한 인물이 없다고들 한다. 그런 말은 우리역사를 깊이 살펴보지 않은 데서 오는 소치이다. 우리의 역사교육의 문제점 중의 하나는 자랑스런 우리 역사의 인물들을 청소년들에게 바로 가르치지 않는 점이다. 지금이나마 우리 자녀들에게 선배들의 빼어난 삶과 생각을 제대로 가르치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 백범의 동학농민전쟁 -
소년 시절 백범은 9세 되던 해부터 마을 서당에 다니며 글공부를 하였다. 그때부터 8년간 열심히 공부하여 1892년 17세 때 해주에서 열린 과거시험에 응시하였다. 그가 가문이 한(恨)이 되었던 상민(常民)의 신세를 면하려면 그가 과거에 급제하여 양반 계급으로 신분이 바뀌는 길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실력을 길러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과거 시험장이 부정이 판치는 아수라장으로 이미 바뀐 때였다. 이 무렵에 이승만도 수차례 과거를 보았으나 번번이 낙방하던 때였다. 이승만은 20세가 되던 1894년에 배제학당에 입학하여 신학문의 길로 나갔으나 백범의 길은 달랐다. 백범은 18세 되던 해인 1893년에 동학(東學)에 입도하였다. 동학에서 내세우는 다음 주장에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첫째 하눌님을 모시고 도(道)를 행한다.
둘째 존비귀천을 없앤다.
셋째 조선왕국을 끝내고 새 국가를 건설한다.
그가 동학에 입도하여 열심히 수행하고 포교에 힘쓴 결과 수천의 무리가 그를 따르게 됨에 그는 그 지역의 접주(接主)로 세움 받게 되었다. 곧 이어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게 되자 그는 총을 가진 군사만도 700여명이나 거느리는 동학군의 지휘관이 되었다. 그의 부대는 황해도의 중심인 해주를 공격하여 탐관오리들과 왜군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공격하였으나 일곱 명 밖에 되지 않는 일본군의 지휘를 받는 수비군에게 오히려 패배하여 뿔뿔이 흩어지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였다.
수비군의 총격에 동학군 3-4명이 총에 맞아 쓰러지게 되니 겁을 먹게 된 동학군들은 전의를 잃고 산으로 들로 달아나 버린 것이었다. 백범은 퇴각 명령을 내려 해주에서 80리 떨어진 곳에 진(陣)을 설치하고는 실패의 이유를 분석하였다.
- 패군지장(敗軍之長)의 경험 -
백범이 해주 지역의 동학군을 이끌던 때에 그의 나이 불과 19세였다. 19세 소년 장군으로 그는 무리들의 신망을 얻어 대장의 역할을 하였으나 그의 군대가 일본군이 뒷받침하는 정부군을 깨뜨리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해주성 공격에 실패하여 패주하게 된 후에 그는 자신의 군대가 왜 패배하였는지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였다. 한 마디로 훈련이 안된 오합지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는 경험과 식견을 갖춘 참모들을 주위에 모아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다음의 다섯 가지를 실천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훈련을 강화하였다.
첫째 군의 기율을 엄숙히 한다.
둘째 동학군이 민가에서 약탈하거나 폐를 끼치는 것을 엄금하여 주민들의 민심을 얻도록 한다.
셋째 어질고 경륜 있는 인재들을 주위에 모은다.
넷째 전군을 구월산으로 집결시켜 강한 훈련을 실시한다.
다섯째 재령, 신천 두 고을에 왜군이 확보하여 둔 수천 석의 쌀을 몰수하여 군량미로 사용 한다.
백범이 구월산 깊숙한 골짜기에서 이런 대책을 하나씩 실천하여 나가던 중에 엉뚱하게 동학군 내부에 분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의 부대는 인근 다른 동학군 부대의 습격을 받아 참모들은 전사하고 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말았다. 그는 상심한 채로 자신의 한 몸을 구월산에서 가까운 신천 청계동에 있는 명문 가문인 안 진사 댁을 찾아 들어 일신을 의탁하였다. 그때가 백범이 20세가 되던 1895년 2월이었다.
이리하여 소년접주 백범의 동학군 참여는 패군지장(敗軍之長)으로 허망하게 끝이 나긴 하였지만 이때의 경험이 그에게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그 기간에 그는 척양척왜(斥洋斥倭), 만민평등 그리고 민족주의에 대한 눈이 열리게 되었다.
안 진사에게는 중근, 정근, 공군이란 이름의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이 후일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그 안중근이다.
- 계속된 패전과 전기 -
백범은 20세 되던 해에 청국으로 갈 결심을 하였다. 앞으로 일본세력에 대적하려면 청국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청국에 뜻이 통하는 동지들을 사귀어 둘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참빗장사를 하는 김형진이란 길동무를 만나 자신도 평양으로 가서 참빗과 붓, 먹, 바늘 등을 사서는 등짐을 지고 중국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중국으로 들어가 가슴 아프게 느낀것은 갑오년 청일전쟁 때 난을 피하여 중국으로 들어가 황무지를 개간하여 살던 동포들이 중국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였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이 속한 나라가 약하여 자신들을 보호하여 주지 못하면 어느 곳에 가서도 사람대접 받지 못하고 살기는 마찬가지이다. 지금 탈북자(脫北者)들이 당하는 고통이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
그들은 국경에 가까운 중국 땅에서 300여 명의 조선 포수들을 규합하여 의병 부대를 결성하고 있는 김이언 부대를 만나게 되었다. 당연히 백범도 그 부대에 합류하여 총이나 화약을 구입하는 일이나 더 많은 포수들을 모집하는 일등을 맡아 활약하였다. 의병 부대는 1895년 11월 초순 압록강이 얼어붙었을 때에 강을 건너 강계성을 공격하기로 날을 잡았다. 그러나 강계성에 이르렀을 때에 주둔군이 일제히 화승총을 발사하며 저항하는 터에 의병군은 사상자들이 발생하여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한 채로 패주하고 말았다. 그래서 백범이 참여하였던 두번째 의병전쟁도 맥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에 백범은 청국에 머무는 것보다 고국으로 돌아가 정세를 살펴 처신키로 하였다.
그는 용강을 거쳐 안악으로 가던 중 대동강 하류의 치하포를 건너게 되었다. 이 치하포에서 그의 평생에 큰 전기를 가져다 준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 바로 '일본인 스치다 살해 사건'이다. 치하포를 건너 주막에 이르렀을 때에 백범의 눈에 수상히 보이는 사람이 띠었다. 비록 조선말을 능숙히 하고 황해도 사람이라고 말은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두루마기 밑으로 칼집이 보였다. 백범은 '그가 그렇게 위장한 채로 여행하는 것을 보니 국모 민비를 시해한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일찌도 모르겠다. 비록 그가 아닐찌라도 칼을 숨기고 다니는 왜인이니 우리 민족에게는 독버섯임이 분명하다. 저놈을 죽여 민족의 치욕을 씻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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