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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명나라의 지시로 이루어진 이씨조선과 삼국사기

最古의 역사서 "삼국사기"와 저자 雷川 金富軾 

[ 이방원과 김부식의 私書 삼국사기 ]
"고구려는 대국인 중국을 범하려가 망했으니 이를 유념하라"

공식적으로 현존하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 "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은 책을 쓴 이후 최근까지 900여년간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평가절하되어왔다.민족사학자들로부터는 '미친 철저한사대주의적'이라고 비난받는 그가 이조사관의 사학자들에게는 '아주 공정한 사학자'라고 평가받아왔다. 또 고대사 기록에 대해서도 허황된 기록이라는 주장에서부터 지나친 실증적 관점으로 우리 고대사의 상당부분을 상실케 한 주범이라는 상반된 지적을 동시에 받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잇따라 발견되는 고고학적 발굴의 성과는 사실의 기록으로서의 "삼국사기"의 중요성을 새롭게 하고 있다. 21세기와 함께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삼국사기"와 김부식의 일생을 돌아봅시다.

'중국 사서(史書)에는 통달해 자세히 알면서도 정작 우리나라의 일을 말하려면 망연해지고 그 시발(始發)을 알지 못하니 한탄할 일입니다. 이 책을 쓰면서 중국의 사서(史書)는 너무 간략하고 우리의 고기(古記)는 문자가 거칠어 삼국의 사실을 다 싣지 못했습니다. 이 책을 명산에 간직하지는 못하더라도 부디 간장병 마개로 쓰지는 말아 주십시오.'

현존하는 국내 최고(
最古)의 역사책이라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편찬자 김부식(金富軾)은 책 편찬을 완료했다며 임금께 내놓은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에 이런 글을 남겼다. 이 짧은 글은 적잖이 음미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김부식이 '우리나라의 일을 너무 모른다'며 민족적 자주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애썼다는 사실을 강조했고, 사서와 고기를 거론한 것은 이전의 많은 역사책을 섭렵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 것이다. '명산에 간직하지는 않아도 좋다'는 말에는 뭔가 '고고한 겸손'이 담겨 있고, 마지막으로 '간장병 마개로 쓰지는 말아 달라'는 문장에 이르러서는 책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느끼게 해 준다.
이 글은 대략 그의 나이 일흔에 쓴 것으로 보인다. 잘 알려진 대로 삼국사기는 고려조 인종 23년인 1145년 편찬이 완료됐고, 그는 1075년 생이기 때문이다. 나이 때문이었는지 '진삼국사표'(
進三國史表)에는 이런 글도 실려 있다.

'신(
)은 늙고 해 저문 나이여서 날로 혼미함이 더합니다. 비록 부지런히 읽는다 해도 책을 덮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잊어버리고, 붓을 들어도 힘이 없고, 종이를 앞에 두고서도 붓이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는 이처럼 늙음을 자탄하고 있는 것이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50권이나 되는 방대한 역사책을, 3년이라는 세월 동안 편찬했던 그의 노고를 이해할 만하다. 책은 제목 그대로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에 대한 "사기"(
史記)다. 사기란 기원전 104년경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전설적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쓴 고대 역사서. 상고(上古)시대에서 시작해 전한의 무제에 이르기까지 무려 2,000년 동안 역대 황제들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담고 있다. 책은 역대 왕조의 편년사인 본기(本紀), 연표(年表), 부문별 문화사인 지(), 열국사인 세가(世家), 개인 전기집인 열전(列傳) 등으로 구성됐다. 서로 다른 역사 부문을 연도와 상관없이 하나로 묶은 역사책이다. 이같은 역사 기술 방식을 통상 기전체(紀傳體)라 하여, 동아시아에서는 연도별로 사건을 정리한 편년체(編年體)와 더불어 대표적인 역사 서술 방식으로 여긴다.

삼국사기 역시 마찬가지 형식을 취했다. 책은 모두 본기, 연표, 잡지(
雜志), 열전 등 네 부문으로 구성돼 있다. 사마천의 '사기'와 비교해 보면 '세가'가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기와 비교해 보면 그밖에도 많은 차이가 있다. 우선 분량의 차이가 눈에 띈다. 사기는 모두 130권에 이르지만 삼국사기는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50권에 불과하다.

편찬 기간과 편찬자 수에서도 차이가 있다. 사마천은 혼자 10여년의 시간을 투자해 '사기'를 편찬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역적 모의에 연루돼 궁형(
宮刑)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 과정에서도 사마천은 집필을 단념하지 않았다. 반면 삼국사기는 대반역으로 왕이된 한민족의 배신자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의 지시에 의해 10여명의 관료를 지원받아 단3년만에 쓴 책이다. 이렇게 보면 삼국사기는 여러 측면에서 1,200년전 사마천이 쓴 사기를 능가하지 못하는 것 이 사실이라 할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유감스럽지만 삼국사기이전의 자료들은 모두 소각되었다. 삼국사기의 근간이 되었던 수많은 자료들중 지금까지 전해져오는 것은 99%로가 없어졌다.그래서 이것만이 한국 고대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써 가장 오래 된 것이 되었다. 그래서...또 한국 고대사에 관한 책이니만큼 고대 동아시아 관계사를 연구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또 비록 11명의 편찬진이 동원됐다고는 해도 이 책의 책임은 김부식 개인이 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저 이름만 얹어놓은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역사 기술 방식에서 아주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의 의견이 절대적으로 지배됐다. 게다가 곳곳에서 '신()이'라는 1인칭 주어가 사용되고 있다. 마치 김부식 개인이 쓴 것 같은 착각을 줄 수 있는 대목이다. 편찬자가 11명이라고는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김부식 개인의 뜻대로 집필되었다는 증거이다. 사마천에게는 절대로 미치지 못하지만, 이외에 남은게 없으니...어찌하랴...국보(國寶)로 남게된 것이다.



철저한 사대주의 의식으로 만들어진 역사서

          (세계에 이런 역사서는 없다) 

삼국사기가 처음 햇빛을 본 지 850년. 그러나 그 오랜 기간 동안 김부식은 칭찬보다 욕을 더 많이 먹었고 삼국사기에 대해서는 혹평 일색이었다.
기본적으로 역사서를 편찬하려는 의도가 좋지 않았다고들 말한다. 그럼으로써 한국 고대사는 물론 3국의 역사를 망쳐 놓았고 두고두고 후세에 큰 부담을 지워 놓았다고 한다. 더욱이 내용의 진위마저 의심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중국이나 일본 등 인근 국가의 역사서들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통사학계에서는 삼국사기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평까지 나왔다.

혹평에는 충분히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철저하게 사대주의적 사관에 기초했다는 사실이 책을 접하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쓰리게 한다. 삼국의 멸망 이유에 대한 김부식의 해석만 봐도 그의 짙은 사대주의적 경향을 읽을 수 있다. 백제 멸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당 고종은 두번이나 조서를 내려 그 원한을 풀도록 했으나 백제는 겉으로는 따르면서 속으로는 이를 어겨 대국에 죄를 지었으니 그 멸망은 또한 당연하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망한 이유도 엇비슷하다. 한마디로 '중국에게 덤비면 반드시 망한다'는 논지다.

'중국의 봉강(
封疆, 영토)을 침범하여 원수를 맺고 그 군현(郡縣)에 들어가 살았으니 병난(兵難)이 끊임없고 화가 미치어 한시도 편안한 세월이 없었다. 급기야 동으로 옮겼지만 수·당의 통일을 무시하고 소명(召命)을 거역하고 불순을 내보였다. 게다가 칙사를 토굴에 가뒀으니 거만하고 모진 성격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중국은 자주 죄를 묻는 군사를 보내게 됐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된 경위에 대한 해석도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
중국을 상국(
上國)으로 잘 모셔 은혜를 입었다는 내용이다.

'지성으로 중국을 섬겨 사신이 산길, 바닷길에 끊이지 않았으며 항상 자제들을 보내 대궐에 나아가 예의를 배우게 하고 태학(
太學)에 보내 배우게 하니 성현(聖賢)의 은혜를 입고 미개(未開)의 습속을 이겨내고 예의의 나라가 됐다. 또 황제의 위력에 의지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땅을 차지해 군현을 만들었으니 거룩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은 사대사상은 자국의 주체성을 높이려는 의지에 조소를 보내게 마련이다. 중국처럼 황제를 칭한다거나 스스로의 연호(
年號)를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가 보기에 연호란 '하·은·주 3대때 백성의 이목을 새롭게 하기 위해 정한 것'이다. 물론 천자 이외의 사람도 연호를 쓸 수는 있다. '큰 운을 타고나 천하를 다투거나 간웅(奸雄)이 틈을 타고 나와 신기(神器)를 노리는 처지'라면 연호 사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중국 대륙에 관한 것일 뿐이다. 그는 삼국은 물론 고려마저 이같은 '큰 운'을 타고나거나 '신기'를 다툴 위치에서 아예 제외시켜 버렸다.
'천자(
天子)의 나라에 소속된 변방 소국은 사사롭게 연호를 지을 수 없다'고 못박은 것이다. 따라서 법흥왕을 비롯해 몇몇 신라왕이 자칭 연호를 쓴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며 이후 당의 지시에 따라 다시 당의 연호를 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주장한다.

민중에 대한 관념이나 사회윤리관도 지금 보면 배척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는 백성에 대한 유교적 접근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백성의 존재가 나라의 흥망을 결정하는 대단히 중요한 조건임을 역설했다. 이를테면 '민심은 천심'이라는 유교적 정치관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백성은 제후의 첫째 가는 보물'이라는 맹자의 말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백성은 국왕의 소유라는 말과 다름아니다. 백성을 주체적 자아로 보는 시각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대신 소유하고 지배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굳이 정통사관을 들지 않더라도, 객관적 안목에서는 충분히 혐오감을 줄 수 있는 내용들이다. 남존여비사상은 거의 극단수준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어떤 신분질서보다 확고부동하게 정해져야 할 것이 남녀의 질서였다. 그는 이같은 입장에 기초해 심지어 자신의 뿌리인 신라마저 비난하고 있다. 신라만이 삼국 중 유일하게 여왕을 뒀기 때문이다. '신라 출신이어서 신라에 호의적으로 역사를 바꿨다'는 비판을 받는 그이지만 이 대목에서만큼은 분명 신라의 제도를 비난하고 있다. 그는 '중국 역사 어디에서도 여왕은 찾을 수 없다'며 '천도(
天道)로도 양은 강()하고 음은 유()하며 인사로도 사내는 높고 계집은 낮다'고 남존여비를 설파한다. 그리고 '할머니들이 안방에서 나와 국가의 정사를 결단하는 것을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라며 '신라가 여자를 추대해 왕위에 앉힌 것은 진실로 난세의 일이니 그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요행'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려시대 여성이나 현대 여성이 들으면 질겁할 얘기다.

   

말도 안되는 논법을 버젖이 쓰고있는 삼국사기.....

도저히 역사서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너무 많은 사서(私書) 삼국사기.

이것이 현존하는 유일한 한민족의 공식적인 역사서이다.

 

이조시대에 삼국사기를 만들면서 이전의 사서들을 모두 없애 버린것입니다. 삼국사기는 7할이 거짖과 은폐 (왜곡,축소)입니다.

이유는 한민족 말살정책이지요. 한민족의 암흑기라고 할수있습니다.

혹자는 이조시대로인해 한민족의 현실이 있을수 있다고하는데

이조는 중국자치국시대였습니다.

 

위에 삼국사기가 고려때 만들어 졌다고 되어있는데 실제로는 이조시대 이방원때에 완성되었습니다. 이때 이방원이 김부식을 사마천보다 더 훌륭하다고 극찬한 기록이 있는데 위에 나와있는대로 명나라의 변방국으로써 김부식의 감독하에 10여명이 만들었고 이에 참고서류는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고구려시대 백제나 신라 탐라 왜 돌궐, 가한등은 고구려의 10분에 1도 안되는 주변 변방국이었습니다. 연개소문이 병사한 후, 내분으로 황족만 소멸되었을뿐 주변국들은 이후에도 계속 활동하여 최근까지 중국을 정복하여 다스렸습니다. 사실이 이러한데 그것을 신라와 백제만의 3국으로 축소,왜곡,조작한거죠.

현재 삼국사기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으며, 지금 있는 것은 이방원에 의해 재작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김부식이 쓴 원본의 내용과 현재 전해지는 삼국사기는 크게 차이가 있습니다.

 

사서에 김부식은 고려시대 문무를 겸한 용장이었습니다. 불교도 고려를 위한 종교였고, 고려의이념은 고토수복으로 후대에 청나라가 이어받았죠.

김부식의 해동사를 없애버리고 삼국사기로 조작한 이방원이 나쁜놈입니다. 후세의 지금 사람들은 모두 속고있는겁니다. 고려 중기시대인물인데 무슨 이조시대 유교사상이란말인가? 이조가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조작했다.

역사상 가장 억울한 인물은 김부식일것이다.

중국에 지나족 역사는 양즈강 이남의 역사가 중국 대륙에 역사로 둔갑하나 고조선 고구리 백제 신라의 북아시아와 중국 중원의 대륙호령하던 역사는 어디로 가고 반대로 축소되어 반도에 남아있는가..

지나족은 반대로 확대 재생산되어 자긍심이 커가고 우리는 축소에 축소되어 열등의식만 늘어나니 빨리 역사를 되찾고 복원시켜 국민성을 되찾아야한다.